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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어느 새벽. 차를 달려 인천항 연안여객선터미널로 향했다. 주말엔 여행객들로 붐비지만 이날은 주중인지라 한산했다. 오전 8시 30분. 백령도행 여객선이 출발했다. 목적지는 대청도. 배는 소청도에 잠시 들른 뒤 백령도에 닿기 30분 앞서 대청도에 당도했다. 그때가 오전 11시 40분. 하선하니 선진포 선착장. 숙박업소 차량이 줄지어 선 채 예약 투숙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섬은 대중교통이 제한적(공영버스 하루 8회 운행)인지라 나 홀로 자유롭게 다니기는 어려운 게 현실. 그래서 이렇게 교통편을 제공하는 숙소를 예약한다.

예약한 펜션은 대청도에서도 평지인 북편의 동내동에 있었다. 짐을 정리하자마자 울창한 솔숲을 가로 질러 해변부터 찾았다. 몇 년 전 취재를 위해 이 미아해변과 농여해변(한데 이어진 형태)에 왔을 때 여기서 얻은 감동이 아직도 생생했던 탓이다. 감동을 주었던 주인공은 '풀등'이다. 이건 일종의 모래톱인데 통상의 경우는 수면 위에 드러나 있지만 풀등이란 이 특별한 모래톱은 썰물 때에만 볼 수 있다.

이건 일종의 모래톱인데 통상의 경우는 수면 위에 드러나 있지만 풀등이란 이 특별한 모래톱은 썰물 때에만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평소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냐 할 수도 있다. 아직 보지 못했다면 당연히 그렇다. 그런데 일단 목격한 뒤엔 그렇게 쉽게 넘기지 못한다. 막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풀등의 때 묻지 않은 청징한 자태에 감동해서다. 잠수 전 물 밖 세상의 티끌과 흔적은 오간 데 없고 오직 수중 세상의 침묵과 평화만을 웅변한다. 정확히 하루 두 번, 이런 자연의 이벤트는 반복되고 그때마다 우린 재탄생의 기적에 탄복한다.

마침 썰물 때였다. 인공의 것이란 단 하나로 찾아볼 수 없는 천연의 해변은 수백 m나 물러난 바다 덕분에 들판처럼 드넓었다. 그 가운데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바다로 인해 군데군데 물이 고여 바다가 풀등으로 인해 여러 개로 나뉜듯한 이색 풍경을 만난다. 여기서도 하이라이트라면 모래사장 표면을 뒤덮은 기하학적 패턴. 수중에선 조류가, 수상에선 바람이 일궈낸 자연의 솜씨인데 특히 이 풀등 위는 더욱 색다르다. 통상의 모래가 사암(砂巖)가루인데 반해 이것은 더 미세한 입자의 규암(硅巖)가루여서다. 이런 패턴은 사막사구에도 발견되는데, 역시 바람에 의해 생긴다. 하지만 풀등의 것은 사구와 조금 달라서 발로 비벼도 지워지지 않는다. 규암질의 모래라 모래밭이 땅처럼 단단해서다. 이웃 섬 백령도엔 군용기가 착륙할 수도 있는 모래사장이 있다. 그 사곶해변(천연기념물 제391호) 역시 규암질 모래밭이다.

규암은 사암(모래로 이뤄진 암석)이 열과 압력에 의해 변한 것. 이걸 통해 대청면의 두 섬(대청도 백령도)이 이런 지질작용의 결과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미아해변엔 그런 지질학적 사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게 있다. 나이테바위다. 땅을 뚫고 5m 높이로 불쑥 솟구친 모습의 이 바위. 수백 결 켜켜이 쌓인 지층흔적이 수직의 나이테를 연상시키는 이 예사롭지 않은 모습. 놀라지 마시라. 지금 당신은 단박에 10억 년 세월을 목도한 것이니까.

더 놀라운 건 이게 지금도 여기서 한창 진행 중이란 사실이다. 바다와 바람이 여기로 끌고 온 규암질 모래가 때때로 쌓인 흙과 교대로 층층이 쌓이는 것인데 이런 특이한 지질현상이 이 섬을 백령도 소청도와 더불어 '국가지질공원'에 등재시켰고 여행자를 불러들이고 있다.

풀등과 서풍받이가 주는 감동

지질학 노천박물관 격인 대청도엔 이 풀등과 쌍벽을 이루는 게 있다. 수면에서 80도 각도로 높이 100m에 이르는 거대한 직벽 '서풍받이'다. 옅은 베이지 빛깔의 이 해안절벽, 한낮이면 잉글랜드 섬 동편 도버해협의 백악절벽(White Cliffs of Dover)을 연상케 하고 해질 녘엔 석양에 발갛게 물들어 요르단 사막의 장밋빛 바위도시 고대유적 페트라(Petra)를 기억에서 불러들인다. 장담컨대 전국 어디서고 이렇듯 장대 호쾌하며 청아 순수 담백 고적한 풍경을 만날 수 없다. 사람 손을 댄 것이라곤 '일(一)'도 없는 청정한 남색의 주변 NLL(북방한계선) 바다가 하얀 절벽과 함께 자아내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중국 시인 이태백의 '산중문답'에 든 시구-'따로 세상이 있긴 한데 인간의 그것은 아니로다')의 비경이 그 요체다.

더더욱 감동을 일이키는 것은 천길 낭떠러지의 가장자리로 이 바다와 절벽해안을 즐기면서 섬 서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 하여 '삼서 트래킹로'인데 '삼서'란 산악지세 대청도의 주봉 삼각산(해발 343m)의 '삼'(三)과 이 서풍받이의 '서'(西)를 지칭한다. 서풍받이는 서풍을 막아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트래킹로는 삼각산 정상에서 광난두로 하산, 서풍받이를 지나 기름아가리를 경유해 광난두 정자각으로 회귀하는 데 길이는 7km. 대청도 여행길에 이걸 뺀다면 그 여행은 '무효'라고 할 수 있다.

대청도는 삼각산(3봉)을 주봉으로 두 개의 작은 봉우리(1, 2봉)로 이뤄진 산악지형. 그래서 평지가 많지 않다. 농민이 많은 백령도와 달리 1400명 주민의 70%가 어민인 것은 그 때문이다. 섬 산은 해발 100m라도 오르기가 쉽지 않다. 육지 산의 경우 탐방로 들머리의 고도가 수십~수백m에 이르는데 반해 섬은 해발 0m여서다. 그런데 삼각산만은 예외. 들머리가 중턱쯤의 고개 마루(매바위 주차장)에 있다. 그래서 한 시간 남짓에 정상을 밟는다. 섬 산의 정상 풍광은 기대한 그대로다. 360도 파노라마가 거침없이 펼쳐진다.

맑은 날이면 소청도와 백령도는 물론 40km 밖 북한의 장산곶(황해북도 용연군)까지 두루 볼 수 있다. 편도 네 시간의 지루한 뱃길 여행에 투자한 시간과 돈이 비로소 아깝지 않다는 자각이야 말로 삼각산이 주는 선물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또 있다. 정상 이정표 상의 거리(직선)인데 평양(163km)이 서울(202km)보다 가깝다.

삼각산이란 지명은 드물다. 중국 우리나라 모두 왕도의 산에만 붙여서다. 대청도는 중국 원나라의 마지막 왕 혜종(혹은 순제 1320~1370)이 세제(世第)시절 3년간 유배됐던 곳. 당시 어린 혜종이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향해 눈물지었을 모습이 상상된다. 유배 중엔 600여 궁인이 그를 보살폈다는데 태자궁터는 지금의 대청초등학교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열한 살(1330년)에 유배를 떠났던 혜종이 대도에서 11대 칸에 즉위한 건 2년 후. 우린 그의 둘째부인을 잘 안다. 드라마 '기황후'를 통해서다. 고려의 공녀(貢女 원나라에 끌려간 고려여성)출신인 황후는 혜종(재위 1333~1368)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드라마에선 두 사람이 대청도에서 만난 걸로 각색됐다. 이 섬에 특히 몽골인 여행자 발길이 잦은 건 그 덕분이다.

대청도에는 해수욕과 캠핑을 즐길 수 있는 해변도 다섯 개나 된다. 그 중 시설이 가장 잘 갖춰진 곳은 북쪽의 지두리 해변. 여기서는 지척의 백령도가 바라다 보인다. 송림 우거진 사구에 자리 잡은 모래울 해변은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 숲에서 휴식할 수 있어 좋다. 이 해변은 서풍받이 근방의 서쪽 해안에 있다.

자연산 홍어의 풍미

국내산 참홍어(간재미 가오리를 칭하는 홍어와 구별해 사용)의 절반 이상이 대청도에서 난다고 하면 모두가 깜짝 놀란다. 그런데 이건 엄연한 사실. 참홍어 명산지로 이름난 흑산도(전남)보다 어획고가 훨씬 높다. 1970년대만 해도 참홍어 잡이 어선 수가 150척에 이르렀다. 지금은 15~20척 정도. 어장은 섬 서편 한 시간 거리. 수확 철은 5~8월, 잡은 참홍어는 냉장 상태로 출하한다. 재밌는 것은 흑산도나 대청도에선 삭힌 참홍어를 맛볼 수 없다는 것. 산지엔 삭힌 홍어가 없다. 당연한 것이 싱싱한 것을 두고 일부러 삭혀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 삭힌 홍어는 모두 육지 사람들 것이다. 대청도 여행길에 홍어 시식은 즐거운 옵션이다.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서포리의 '펜션식당 솔밭나루터'(032-836-8999)에서 홍어 요리를 있는 대로 모두 주문해 봤다. 막 잡아 썰어 낸 두툼한 홍어회, 살짝 쪄내 보들보들한 홍어찜, 고춧가루 듬뿍 뿌려 칼칼하게 끓여 낸 홍어매운탕, 꾸덕꾸덕 말린 홍어를 손으로 잘게 찢어 양념 간을 한 홍어무침이 간재미 초장무침 등과 함께 한 상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백미는 따로 있다. 홍어 내장 중에 간에 해당되는 싱싱한 홍어 애. 참기름장에 찍어 먹으니 푸아그라(프랑스식 거위간 요리)는 저리가라다. 회는 시가판매라 밝히기 어렵지만 어찌됐던 예상보다 저렴해 놀랄 정도다. 이튿날 여객선에 오르기 전 아침 겸 점심식사를 선착장 근방의 한 식당에 들렀다. 우럭 매운탕을 주문했는데 주인은 수조에서 산 우럭을 잡아 끓여냈다. 그 맛이 어떨 지는 상상에 맡긴다. 이 섬에선 양식생선을 만날 수 없다. 그게 자연산보다 더 비쌀테니 너무나 당연한 일. 삼각산과 서풍받이의 삼사트래킹, 농여해변의 풀등과 나이테바위에 이어 홍어요리와 산 우럭 매운탕 시식은 대청도 여행길에서 '무효방지'를 위한 3대 아이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