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대상이던 HIV 감염,
약으로 관리하는 만성질환이 됐다
고려대 안암병원 감염내과 손장욱 교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에이즈)은 1980년대 발견 초기만 해도 '죽음의 병'으로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현재는 달라졌다.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ART)의 발전으로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된 환자도 다른 만성질환 환자와 마찬가지로 약을 복용하며 관리할 수 있다. 고려대 안암병원 감염내과 손장욱 교수를 만나 에이즈 치료법의 진전과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손 교수는 고려대 안암병원 감염내과에서 오랫동안 에이즈 환자를 진료해온 전문가다. 임상 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를 돌보며 HIV 치료가 진전한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HIV바이러스 억제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 도입 초기부터 환자 치료에 참여해왔다. 'HIV 감염은 더 이상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손 교수에 따르면 에이즈는 HIV에 감염돼 면역 기능이 크게 떨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HIV 감염이 곧바로 에이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가 CD4+ T세포(세포표면항원무리)를 파괴해 수치가 일정 기준 이하로 떨어지거나 기회 감염이 발생할 때 비로소 AIDS로 진단된다. CD4+ T세포는 흔히 '지휘자'에 비유된다.
바이러스나 세균이 침입했을 때 면역체계라는 군단에서 각 부대를 조율하고 적절한 대응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이 지휘자가 사라지면 군대는 흩어지고, 작은 공격에도 속수무책이 되는 것과 같다.
감염과 발병의 차이
HIV는 혈액, 정액, 질 분비물, 모유 등 다양한 체액에 존재한다. 주된 감염 경로는 성 접촉과 주사기 공동 사용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세균이나 곰팡이에도 쉽게 감염될 수 있다는 점에서 HIV 감염인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HIV 감염은 바이러스가 체내에 들어와 면역세포를 공격하는 상태이고, 에이즈는 그 결과 면역세포 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거나 기회감염이 동반되는 상태다. 원인과 결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구분을 명확히 해야 환자의 현재 상태와 치료 방향을 정확히 잡을 수 있다.
HIV 감염인은 체내에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면역세포 수치가 일정 수준 이상이거나 AIDS 정의 질환이 없는 경우를 포함한다. 반면 에이즈 환자는 CD4+ T세포 수가 200/㎣ 미만이거나 주폐포자충 폐렴같은 특정 기회 감염을 동반한 경우로 정의된다. 무엇보다 감염과 발병을 혼동하면 HIV가 곧바로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오해가 생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HIV는 면역을 조율하는 CD4+ T세포를 집중 파괴한다. 이 세포가 무너지면 항체 생성, 세포독성 반응, 대식세포 활성 등 면역 기능이 전반적으로 마비된다. 이 기능이 마비되면 정상적인 상태라면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감염에도 취약해진다.
감염 초기 급성 증상기에는 발열, 림프절 비대, 발진 등이 나타난다. 이후 무증상기가 길게 이어지지만 이 시기에도 면역세포는 꾸준히 파괴된다. 증상 발현기에는 체중 급감, 만성 피로, 구강 칸디다증 같은 감염이 발생하고, 마지막으로 AIDS 단계에서는 심각한 기회감염이 동반된다. 무증상기라고 하더라도 정기적인 검사와 치료가 필수적이다.
HIV 감염 시 급성 증상기에는 환자의 30~50%가 발열, 근육통, 식욕부진, 피부 발진 등 비특이적인 증상을 경험하며 대개 10~15일간 지속된다. 무증상기는 평균 8~10년 이어질 수 있는데, 특별한 증상이 없어 방심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타인에게 전파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정기 검진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차는 초기 감염 당시의 바이러스 양과 독성, 개인의 건강 상태, 그리고 CCR5 수용체 변이 같은 유전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환자는 6개월 만에 증상이 나타나지만, 어떤 환자는 10년 이상 무증상 상태를 유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적 사례를 근거로 치료를 미루는 것은 위험하다.
과거에는 약 부작용이 심했고 하루 세 번 복용해야 했다. 환자들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는 하루 한 알로 충분하며 부작용도 거의 없다. 복용이 쉬워지면서 순응도가 올라가고 질병 조절도 잘된다. 당뇨보다 관리가 쉽다고 할 정도다. 지금은 직장생활은 물론 임신과 출산까지 일상 전반이 가능하다.
ART는 여러 가지 항바이러스제를 병용해 바이러스 증식을 억제한다. 대부분의 환자는 6개월 이내에 혈중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미검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유엔 산하 에이즈 전담 기구(UNAIDS)는 2018년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으면 성 접촉을 통해서도 전파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20년 동안 수집한 과학적 증거에 기반한 UN기구의 공식 발표는 미국과 영국 등 주요 국가에서 선언문으로 채택되었으며, HIV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줄이고 치료 순응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HIV 감염인은 비감염인과 비슷한 삶의 질과 기대수명을 누리게 되었다. 손 교수는 "과거에는 환자들이 타인에게 전파할까 두려워 인간관계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치료를 통해 당당히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증상 나타나지 않아도 정기 검진은 필수
병원에서 처방 약을 잘 복용해 혈액 속 바이러스가 미검출 상태가 되면 성관계나 출산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지 않는다는 점을 공식화한 것이다. 환자들에게는 '나는 타인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확신을 주는 선언이다. 현재 국내에서 치료 환자의 90% 이상이 미검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건전한 성생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콘돔 사용은 HIV뿐 아니라 여러 성병을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또한 주사기 공동 사용 같은 위험한 행동은 절대 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혈액을 통한 감염은 극히 드물며, 주된 경로는 성접촉이다.
젊은 층에서 인식은 커지고 있지만, 약값과 보험 적용 문제로 보급은 제한적이다.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이 확대된다면 더 많은 고위험군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PrEP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미리 복용해 감염 위험을 낮추는 방법으로, 감염에 취약한 고위험군에서 효과가 큰 것으로 입증됐다. 미국, 유럽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관심이 커지고 있다.
조기 발견 후 치료제 하루 한 알로 관리
다수의 성 파트너가 있거나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 주사기 공동 사용 경험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검사가 필요하다. 보건소에서 익명 검사도 가능하고, 자가 검사 키트도 보급돼 접근성이 높아졌다.
이 대목에서 손 교수는 "증상이 없다고 안심하는 것은 금물이다. 무증상기에도 바이러스는 전파된다"며 "정기적 검사와 조기 치료야말로 HIV 관리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HIV 감염인과 커피 한 잔도 함께 못 마신다는 편견이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HIV가 동성애와 연결돼 인식되는 구조적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를 해소해야 HIV 감염인을 만성질환 환자로 받아들여 적극적인 치료를 확대할 수 있다.
일부 환자는 사회적 낙인 때문에 진단을 미루거나 치료를 피한다. 또한 일부 의료기관은 HIV 환자 진료를 꺼리기도 한다. 의료진의 인식 개선과 병원 문턱을 낮추는 제도적 지원도 필요하다.
HIV 치료 자체보다 환자가 일반 진료에서 차별을 겪는 경우가 더 어렵다. 치과, 내시경 같은 기본 진료를 거부당하면 환자들에게 큰 상처가 된다. 이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ART 덕분에 기대수명은 비감염인과 비슷해졌다. 그러나 완치를 위해서는 '바이러스 저장소'를 제거해야 하는데, 아직 임상적으로 적용할 수준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므로 장기적으로는 희망이 있다.
건전한 성생활이 예방의 핵심
의료적으로는 조기 진단과 치료 연계를 강화해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차별과 편견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HIV 감염도 결국 만성질환의 하나로 인식돼야 한다. 환자가 당당히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함께 지원해야 할 것이다. 이 질환은 단순한 개인의 건강 문제를 넘어 사회적·보건적 과제다.
손 교수는 인터뷰 내내 "이제는 의학적으로 HIV가 극복 가능한 질환이 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남은 과제는 사회적 차별을 줄이고 환자들이 두려움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 EDITOR: 김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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