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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ING TRAVEL

홋카이도 가든 가도 꽃보다 빛과 바람,
특별한 정원의 위로

남양주시 풍경

초원에 조성된 도카치 정원.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는 남한 면적의 약 83%일 정도로 광대하다. 예전에 이 섬을 여행했을 때에는 삿포로나 오타루 같은 유명 관광지를 다녔는데 올해에는 이 섬 내부에 있는 가든 가도(街道)를 천천히 둘러봤다. 홋카이도 가든 가도 여행은 섬 내부의 정원 8곳을 잇는 250km 여정인데, 저마다 독특한 정원은 방문객에게 특별한 위로의 메시지를 건넨다.

마나베가든
마나베가든.

홋카이도 가든 가도의 정원들은 일본 전통 정원이 아니다. 거대한 산맥을 배경으로 땅의 얼굴을 드러내는 '도카치(十勝) 천년의 숲', 꽃보다 잎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침엽수 정원 '마나베 정원', 할머니가 일군 정원을 손자가 이어 가꾸는 '시치쿠 가든'…. 전통을 내세우지도, 일본식 느낌을 내지도 않는다.

가든 가도 주변에 보이는 농가는 낮고 넓은 하늘과 들판을 배경으로 소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이슬란드나 하와이 빅아일랜드를 여행할 때와 비슷한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낯선 여행객들도 정원을 둘러보며 금방 긴장을 풀어낸다. 정원 벤치에 앉아 어깨에 내리쬐는 햇빛을 느끼고, 천천히 걸으면서 흔들리는 나뭇잎의 속삭임을 듣는다. 이들이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며 감탄하는 모습도 익숙해 보인다.

이번 여행은 필자가 『정원의 위로』라는 책을 펴낸 일을 계기로 한국의 정원 애호가들과 함께 진행했는데 정원에 대한 이들의 식견은 생태 복원력을 중시하는 홋카이도 정원 수준만큼이나 높았다. 서둘러 사진만 찍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진한 감동을 담아오는 여정이었다.

나비가 머무는 정원

다이세츠 모리노가든에 찾아온 나비(1)
다이세츠 모리노가든에 찾아온 나비.
다이세츠 모리노가든 숲에 설치된 나무 실로폰(1)
다이세츠 모리노가든 숲에 설치된 나무 실로폰.

'다이세츠 모리(大雪森)노가든'에 들르면 '숲의 실로폰'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귓가에 선명한 여운을 남긴다. 정원 안 '놀이의 숲' 속에는 40m 길이의 목재 실로폰이 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고무 공을 떨어뜨리니 341개 나무 건반을 내려오면서 바흐의 선율을 연주했다. 숲의 바람 소리, 새 소리, 그리고 공이 나무판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 숲 전체가 하나의 사운드 가든이다. 이 실로폰은 일본 최대 이동통신 회사 NTT도코모가 숲 보전 캠페인을 위해 만든 영상 광고의 소품이었다.

다이세츠 모리노가든(1)
다이세츠 모리노가든.
다이세츠 모리노가든에서 쉬고 있는 여행객들(1)
다이세츠 모리노가든에서 쉬고 있는 여행객들.

숲속에서 솎아낸 나무로 실로폰을 만들고 이를 광고에 활용해 2011년 프랑스 칸 광고제에서 상도 받았다. 2015년 '홋카이도 가든쇼'를 계기로 다이세츠 모리노가든에 설치됐다. 지방 정원인 이곳은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이 협력해 숲의 가치를 감성적으로 전하는 명소가 됐다.

이 정원의 콘셉트는 숲속의 집이다. 산지 지형을 크게 손대지 않고 숲의 거실, 숲의 부엌 등으로 공간을 나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꽃 반, 나비 반'인 풍경이었다. 나비가 어떻게 그리 많을 수 있는지 묻자 정원 관리자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벌레가 생기는 것도, 나비가 날아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게 곧 자연이다." 인위적으로 관리해야만 예쁜 정원이 된다는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깨뜨렸다. 정원은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장소였다.

미래세대에 전하는 생명력

홋카이도 가든 가도 조성은 2010년 본격화했다. 도카치 천년의 숲을 조성한 도카치 마이니치신문의 하야시 카츠히코(林克彦) 대표와 아사히카와에 우에노팜을 만든 우에노 사유키(上野砂由紀) 씨가 손잡고 민간과 지방 정부, 기업이 힘을 합했다. 2014년 다이세츠 모리노가든까지 합류하면서 8개의 정원이 연결됐다.

도카치천년의 숲
도카치천년의 숲.

도카치 천년의 숲에 들어서 광활한 대지와 초원을 마주한 순간 정원이 단지 꽃을 장식적으로 심는 곳이 아니라는 걸 체감한다. 이 정원을 조성한 지역 신문사는 '1000년 동안 유지되는 숲'이라는 꿈을 품고 영국 정원 디자이너 댄 피어슨 씨와 함께 고산지대 토착 식물로 탄소 중립 정원을 만들었다. 인간이 개입한 인상을 주지 않는 야생의 감각이 신선하다.

잠깐 발길을 멈춰 피어슨 씨가 전했던 말을 떠올려 본다. "정원은 자연과 가까워지는 길이자, 환경을 돌보는 과정을 통해 대화를 여는 방식이다. 천년의 숲은 '정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할 것이다. 독특한 개성의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빛의 변화를 느끼기만 해도 우리는 다시금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다. 자연의 깊은 감정을 미래 세대에 전하고 싶다." 바로 그 벤치에 평화롭게 누워있는 방문객이 보였다.

정원에서 찾은 치유와 회복

우에노 씨는 가든 가도를 만든 일등 공신이다. 정원 8곳 중 3곳을 직접 디자인했다. 시작은 우에노팜이었다. 영국에서 가드닝을 배우고 고향 아사히카와로 돌아와 대대로 쌀농사를 짓던 가문의 농장에 2001년 영국풍 정원을 만들었다.

그 후 '바람의 정원'과 '다이세츠 모리노가든'도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바람의 정원은 후지TV 드라마 '바람의 정원'(2008년)의 배경이 됐다. 우에노 씨는 어떻게 꽃을 심을지 안내하는 책도 여러 권 펴냈다. 자신의 정원처럼 화사한 미소로 설명해주고 손 흔들어 배웅한 그가 얼마나 정성스레 정원을 돌볼지 짐작이 갔다.

바람의 정원 램스이어 표지판(1)
바람의 정원 램스이어 표지판.
우에노팜에서 만난 우에노 사유키 씨(1)
우에노팜에서 만난 우에노 사유키 씨.

드라마 '바람의 정원'은 '정원→드라마→정원'의 선순환을 보여준다. 드라마 '북쪽 나라에서'로 유명한 일본 극작가 쿠라모토 소우(倉本聰) 씨가 후라노(富良野) 뉴프린스 호텔 골프장 터에 정원을 만들어달라고 우에노 씨에게 의뢰했다. 드라마는 그렇게 완성된 정원을 소재로 탄생했다. 드라마 주인공은 도쿄의 잘 나가는 의사. 바쁜 일상과 스트레스로 가족과 멀어졌다가 시한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오래전 떠나왔던 고향 후라노로 돌아온다.

고향에는 그의 아버지, 지적 장애를 지닌 아들, 그리고 오랜 불화를 겪은 정원사 딸이 있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병을 숨긴 채 가족을 만난다. 드라마 배경인 '바람의 정원'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아내를 기리며 만든 공간이다.

바람의정원(2)
바람의정원.

다년생 식물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가족의 행복했던 나날을 상징한다. 주인공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딸과 화해하고 정원에서 열린 결혼식에 신부 아버지로서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 가족과 화해라는 오랜 꿈을 이룬 뒤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눈을 감는다.

정원은 그렇게 치유하고 회복하는 공간이다. 드라마를 본 방문객이 이어지면서 정원에는 드라마 장면을 구현한 공간들이 들어섰다. 식물 이름표 앞에는 '만져보세요'라는 안내문이 있다. 보드라운 감촉의 '램스이어'('양의 귀'라는 뜻의 식물)를 만지면 마음도 부드러워진다.

지역과 삶을 지켜내는 정원

롯카노모리 정원(1)
롯카노모리 정원.

롯카노모리 정원은 마음을 정돈해주는 곳이었다. 언덕과 숲 사이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하도 맑아 물속 풀들이 마치 머리를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오두막 갤러리들에서는 지역의 자연을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카페에서는 지역 농축산물을 활용한 음료와 과자를 내놓았다.

이 정원은 제과 회사 롯카테이(六花亭)와 인연을 이어온 곳으로도 유명하다. 롯카테이 창업자 오다 도요시로(小田豊四)씨는 음식을 통한 마을 만들기에 앞장섰다. '지역 문화는 과자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1960년에 어린이 시(詩)를 게재하는 잡지도 창간했다.

잡지의 표지에 들어가는 그림은 산악 화가가 그렸는데 그 화가가 그린 해당화를 포함한 여섯 송이 꽃 그림은 롯카테이 포장지에 들어갔고, 2007년에는 그 꽃들을 심어 정원 문을 열었다. 지금도 예쁜 꽃무늬 포장지를 다시 보러 정원을 찾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정원은 지역과 삶의 공간을 지켜내는 실천의 무대였다.

관람의 마지막 동선에는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있다. 통창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시간이 평화로워 보인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과자와 사탕뿐 아니라 정원의 꽃들로 디자인한 쿠션 커버와 앞치마도 판매한다. 모두 사 놓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리의 일행 중 한 명은 10년 전 이곳을 들러 꽃무늬 포장지와 쇼핑백을 구해놓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움을 품는 정원의 위로

시치쿠 정원은 고인이 된 시치쿠 아키요(紫竹昭葉) 할머니가 만들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63세 때 "어릴 적 들꽃 사이를 뛰놀던 풍경을 내 손으로 다시 만들고 싶다"며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2021년 5월 평소처럼 오전 6시에 정원을 돌보다가 꽃씨를 쥔 손을 내밀며 쓰러졌다고 한다. "꽃밭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좋겠다"던 할머니는 정원처럼 살다가 정원에서 떠났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꽃장식 모자를 즐겨 쓰던 귀여운 할머니가 떠난 후 정원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다. 정원에 가보니 할머니의 손자가 정원을 관리하면서 친절하게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는 할머니가 쓰던 모자들을 여러 개 정원에 비치해 두고 관람객들이 써볼 수 있게 했다. 그는 "이렇게 비스듬히 써야 예쁘다"며 촬영 각도까지 챙겨줬다. 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 걱정 없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치쿠가든 안에 있는 건물
시치쿠가든 안에 있는 건물.
시치쿠가든에서 써 볼 수 있는 모자
시치쿠가든에서 써 볼 수 있는 모자.

여행을 마치고 '아사히야마 동물원'이라고 적힌 과자 케이스를 들고 왔다. 이 동물원으로 유명한 홋카이도의 도시, 아사히카와(旭川)의 OMO7(오모 세븐) 호텔에서 사온 과자인데 케이스가 미니 버스 모형이다. 여기에 그려진 곰과 물개 그림은 낯선 도시를 찾아온 여행자에게 따뜻한 정감과 여운을 남겨 준다.

  • ARTICLE·PHOTO: 김선미 동아일보 기자·『정원의 위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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