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시간을 건너 이어진 약속 독립운동가 김탁원·길정희 선생의 정신
후손의 기부로 고려대 의대에 돌아오다
윤을식 고려대학교 의무부총장(왼쪽)과 故 김상덕 기부자의 장남 Dean Paik(딘 백)이 기부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 세기를 돌아 고귀한 인연이 다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품에 안겼다. 고려대학교의료원은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故 김상덕 기부자의 뜻을 기리는 기부식을 열고 30만 달러(약 4억 3,000만 원)의 기부금을 전달받았다. 이번 기부는 단순한 후원을 넘어 고려대 의과대학의 시작과 깊이 맞닿아 있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故 김상덕 기부자는 일제강점기 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기반을 마련한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탁원·길정희 선생의 후손이다. 한 세기 전 한국 의학교육의 새로운 길을 열었던 선구자들의 정신이 후손의 기부를 통해 다시 미래 의료 인재들에게 이어졌다.
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시작
1920년대 조선, 여성이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교 관습의 벽에 막혀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지 못하는 여성 환자들의 고통은 깊었으나, 이들을 치유할 여성 의사를 양성할 전문 기관은 전무했다.
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나선 이가 미국인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이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부부인 김탁원, 길정희 선생과 뜻을 모아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문을 열었다. 민족 최초의 여자의학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위대한 첫걸음이자, 오늘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유구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성도 인술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시대적 선언이자, 사회적 편견에 맞선 용기 있는 약속이었다. 1933년 로제타 홀 여사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강습소 운영은 김탁원·길정희 부부에게 맡겨졌다. 두 사람은 재정난과 일제의 통제 속에서도 강습소를 지키며 여성 의학교육을 이어갔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의사시험 준비를 돕는 한편, 여성 의학교육을 정식 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이들의 헌신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오늘날 고려대 의과대학의 역사적 토대가 됐다.
한 세기의 정신, 미래로 이어지다
이번 기부의 주인공인 김상덕 기부자는 이러한 역사적 정신을 이어온 후손이다. 고려대 의과대학 11회 졸업생인 그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의료와 교육의 가치를 실천해 왔다. 또 모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의과대학 교수로도 봉사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보탰다. 그는 생전 부모님이 평생을 바쳐 지켰던 가치, 즉 '교육과 의료를 통한 사회적 기여'가 모교를 통해 영원히 이어지길 소망했다. 이번에 전달된 유산은 그 간절한 바람이 빚어낸 결실이다.
기부금은 의과대학 '김상덕 장학금'을 조성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꾸는 미래 의사들을 지원한다. 또한 로제타 홀 여사와 김탁원·길정희 선생의 흉상 제작에도 활용돼 고려대 의과대학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는 상징적 의미를 더할 예정이다.
지난 3월 7일(현지 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기부식에는 윤을식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과 편성범 의과대학장, 손호성 의무기획처장, 김훈엽 대외협력실장이 참석했다.
김상덕 기부자의 장남 딘 백(Dean Paik), 차남 데이비드 백(David Paik) 등 유가족도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딘 백은 "어머니께서 평소 마음속에 품고 계셨던 모교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셨던 어머니의 뜻이 미래 의료계를 이끌어갈 학생들에게 잘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을식 의무부총장은 "김탁원·길정희 선생의 뜻을 이어 소중한 나눔을 실천해 주신 김상덕 기부자와 유가족께 깊이 감사드린다"며 "2028년 고려대 의대 100주년을 앞둔 뜻깊은 시점에서 이번 기부가 미래인재 양성과 의학교육 발전에 의미 있게 쓰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1928년 작은 강습소에서 시작된 여성 의학교육의 꿈은 수많은 의사를 길러내며 한국 의학 발전의 토대가 됐다. 그리고 이제 그 정신은 후손의 기부를 통해 다시 새로운 백 년을 향해 나아간다. 이번 기부는 단순한 후원이 아닌 고려대 의과대학의 역사와 정신을 미래 인재들에게 전하는 '시간을 뛰어 넘은 약속'이다.
- EDITOR: 고려대학교의료원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