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가까운 도시
보고타와 사랑에 빠지다
콜롬비아 보고타 몬세라테 언덕 전경.
푸니쿨라를 타고 해발 3,170m 언덕 정상에 오르면 보고타 시내의 매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데스산맥 해발 2,600m 고산 평원 위에 자리한 도시, 별과 가까운 구름 위 수도. 남아메리카 대륙 콜롬비아의 보고타는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행자에게 낯선 세계에 들어온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서울에서 보고타까지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편도 약 25시간의 여정을 각오했지만, 출발 무렵부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환승 예정이던 미국 뉴욕행 비행기가 폭설로 인해 제시간에 출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영국 런던을 경유해 콜롬비아로 향하는 항공편으로 바꿔 타야 했다. 장장 30시간의 여정 끝에 보고타 엘도라도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체력이 바닥나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음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보고타행 비행기 안에서 '백년의 고독'을 읽어서였을까. 콜롬비아가 낳은 세계적 작가이자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의 본업은 신문기자였다. 가상의 마을 '마콘도'에서 펼쳐지는 한 가문의 100년 역사를 다룬 이 책의 도입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세상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들이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리키려면 손가락으로 짚어야 했다.' 창밖을 바라보자 구름 사이로 낯선 대륙이 펼쳐졌다. 필자에게 콜롬비아는 마콘도와 다름없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구름 위의 도시
보고타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몬세라테 언덕이었다. 해발 2,600m 높이의 보고타에서 푸니쿨라(산악열차)를 타고 언덕 정상으로 올라가면 해발 3,170m에 이른다. 케이블카가 천천히 올라갈수록 도시 풍경은 점점 멀어지고 구름은 가까워졌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든 케이블카를 타는 일은 늘 설렜지만, 보고타는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올라가다 보면 하늘의 별을 딸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보고타 시내가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보고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67층 'BD 바카타' 빌딩도 이곳에서는 손바닥 위 모형처럼 작아 보였다. 안데스산맥의 능선과 붉은 지붕의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야말로 구름 위 도시였다.
몬세라테는 단순한 전망대가 아니다. 정상에는 17세기 성당이 있어 보고타 시민들은 일요일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언덕을 걸어 오른다. 순례자들도 각국에서 모여든다.
성당 앞 작은 수조에는 소원을 비는 동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동전을 던지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노란 나팔 모양의 꽃인 옐로우 엘더가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와 소원을 비는 여행자를 조용히 응원해주는 듯했다.
보고타의 역사적인 구시가지 라 칸델라리아는 도시의 문화와 역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지역이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볼리바르 광장과 콜론 극장 등 문화적 중심지들이 모여 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이어지는 골목에는 형형색색의 벽화가 가득하다. 이 그림들은 도시 전체를 거대한 야외 미술관처럼 보이게 만든다.
라 칸델라리아 지구의 자갈길에 자리한 레스토랑 '오리헨 비스트로'는 아름답게 복원된 식민지 시대 주택에서 정통 콜롬비아 요리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림 같은 안뜰과 울창한 녹지, 옛 보고타의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아늑한 좌석들이 인상적이다. 옥수수 반죽으로 만든 빵 아레파와 파타콘 애피타이저, 신선한 세비체, 콜롬비아 전통 치킨 수프 아히야코, 통째로 구운 닭 등 전통 요리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메뉴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는 보테로 미술관도 있다. 콜롬비아 출신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1932~2023)는 인물과 사물을 둥글고 풍만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권력자도, 모나리자도, 발레리나도 모두 통통하고 둥글게 다가왔다. 꽃다발 속 꽃들까지 동그랬다. 그의 그림은 묘하게 유쾌했다. 현실의 고단함을 조금은 부드럽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미술관 중앙에는 작은 정원도 있다. 회랑이 둘러싼 스페인식 안달루시아 정원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요한 휴식 공간이다. 여행 중 잠시 숨을 고르기에는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었다.
미술관 맞은편에는 루이스 앙헬 아랑고 도서관이 있다. 100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한 남미 최대 규모의 도서관 가운데 하나다. 보고타가 2007년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책의 수도'로 지정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도서관 벽면에는 이런 문구도 쓰여 있었다. '정원을 가꾼다는 건 내일을 믿는 일이다 - 오드리 헵번'.
시내 레르네르 서점도 보고타 문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필자는 이곳에서 콜롬비아 시인 호세 아순시온 실바의 시집을 샀다. 표지에는 난초와 벌새가 그려져 있었다. 보고타의 자연과 예술을 함께 담은 작은 기념품 같았다.
그래피티가 바꾼 마을
보고타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도심 북쪽 언덕에 자리한 에히프토(Egipto) 지역이다. 한때 이곳은 범죄와 폭력으로 악명이 높던 동네였다. 외부 사람들은 위험한 지역이라 여기며 발길을 꺼렸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지역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벽화를 그리며 마을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피티 투어는 이 변화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벽마다 거대한 그림들이 등장한다. 어떤 벽화에는 젊은이들의 얼굴이, 또 다른 벽에는 총 대신 꽃을 든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두 명의 현지 가이드는 그림 속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곳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어떻게 갱단에 들어가고, 때로는 폭력 속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는지,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술을 통해 마을을 바꾸려 했는지를 차분히 설명했다.
그래피티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공동체의 기억이자 희망의 메시지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 투어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에는 태어난 장소만으로도 삶의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콜롬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생물 다양성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4,000종이 넘는 난초와 약 1,900종의 새가 서식한다. 지구의 새 다섯 종 중 한 종이 콜롬비아 하늘을 난다는 말도 있다. 이 풍부한 생태계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 보고타 식물원이다. 정식 명칭은 '호세 셀레스티노 무티스 식물원'. 보고타에 백신을 도입한 스페인 신부이자 과학자인 호세 셀레스티노 무티스(1732~1808)의 이름을 따 1955년 문을 연 곳이다.
식물원의 하이라이트는 남미에서 가장 현대적인 온실로 꼽히는 '엘 트로피카리오'(2022년 완공)다. 여섯 개의 온실 모듈이 서로 연결돼 아마존의 습윤 열대림부터 안데스의 파라모 고산지대까지 콜롬비아의 자연을 두루 보여 준다. 안데스 고산 습지 식물인 프레일레혼, 열대림 식물 헬리코니아, 사막의 선인장 등 남미의 다양한 생태계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 콜롬비아의 나라꽃인 카틀레야 트리아나이 난초도 볼 수 있다.
식물원 입구에는 은빛 잎을 가진 야루모 나무가 서 있다. 콜롬비아 사람들이 이 나무를 각별하게 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훼손된 숲에서 가장 먼저 자라나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개척종이기 때문이다.
콜롬비아는 안데스산맥이 세 갈래로 나뉘며 국토를 관통한다. 남쪽에는 아마존의 열대림이 이어지고, 북쪽에는 카리브해의 따뜻한 바다가 닿아 있다. 여기에 안데스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고산 습지 생태계인 '파라모'까지 더해진다.
콜롬비아에서는 조금만 이동해도 풍경과 식물이 완전히 달라진다. 보고타에서 차로 몇 시간을 달리면 가는 곳마다 숲의 색도, 공기의 냄새도 달라진다. 그리고 변화의 경계마다 어김없이 야루모가 있다.
야루모는 산사태가 지나간 비탈에서도, 오래된 농장이 버려진 자리에서도 가장 먼저 은빛 잎을 펼친다. 빠르게 자라 다른 작은 식물들이 뿌리내릴 그늘을 만든다. 넓은 잎은 토양을 이불처럼 덮어주고, 줄기 속에는 개미가 살며, 새들에게는 열매를 내준다.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게릴라와 마약 카르텔 등 오랜 내전과 폭력의 상처를 지닌 콜롬비아 사람들에게 이 나무는 '희망'과 '치유'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음악과 미식의 도시
저녁이 되면 보고타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도시 북쪽 치아 지역에는 콜롬비아의 전설적인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인 '안드레스 카르네 데 레스'가 있다. 1982년 안드레스 하라밀로가 도로변의 작은 그릴 식당으로 시작한 이곳은 이제 콜롬비아 문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공간으로 성장했다.
레스토랑과 바, 댄스플로어, 공연장이 한 공간에 뒤섞여 있다. 벽에는 네온 조명과 기묘한 장식품들이 가득하고 음악은 끊임없이 흐른다. 사람들은 식사를 하다가도 음악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춤을 춘다. 저녁 식사가 곧 축제가 되는 장소다.
보고타에는 콜롬비아 전역에서 사랑받는 '크레페 앤드 와플'이라는 레스토랑도 있다. 1980년 두 대학생이 작은 차고에서 시작한 이곳은 치킨과 버섯 크레페, 카레 치킨 크레페 같은 메뉴로 인기를 끌고 있다. 바삭한 와플과 수제 아이스크림도 유명하다. 특히 여성 가장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지속 가능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사회적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라 콜롬비아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보고타 코르페리아스 컨벤션센터에서는 세계 여행사와 관광기업이 모여 여행상품을 거래하는 국제 관광 비즈니스 행사 '콜롬비아 트래블마트 2026'이 열렸다. 콜롬비아 수출·관광·해외투자 진흥청인 프로콜롬비아(ProColombia)가 콜롬비아 여행업협회(ANATO)의 관광 박람회와 연계해 연 이 행사의 올해 주제는 '콜롬비아, 아름다움의 나라'였다.
35개국에서 온 해외 바이어 200여 명과 콜롬비아 관광기업 217곳이 참여해 2만 7,000건의 비즈니스 상담이 이뤄졌다. 콜롬비아 전체 32개 주가 참여한 관광 박람회에는 사흘 동안 5만 6,000여 명이 찾아와 지역 축제처럼 행사를 즐겼다. 콜롬비아 관광 산업은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콜롬비아를 찾은 외국인 방문객은 약 470만 명에 이르렀다.
코로나19 이후 해외여행이 재개된 2022년 8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콜롬비아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2,200만 명을 넘어섰다. 커피와 카카오 농장 체험, 자연경관 감상 등 다양한 체험형 관광상품이 콜롬비아 전역으로 세계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갈수록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해외 여행객들의 수요를 반영해 앞으로 지역 관광지를 더욱 활발하게 발굴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뉴욕을 거쳤다. 이번 여행으로 지구 한 바퀴를 돈 셈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길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자꾸만 보고타가 생각났고 그리웠다. 몬세라테 언덕에서 바라본 구름 위 도시의 풍경, 보테로 미술관의 고요한 정원, 그래피티로 다시 태어난 에히프토의 골목, 그리고 음악과 춤으로 가득했던 콜롬비아의 밤까지. 예술과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는 도시, 보고타는 그렇게 여행자의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 ARTICLE·PHOTO: 김선미 동아일보 기자·'정원의 위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