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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ING TRAVEL

스위스 서남부 알프스와 호수가 선사하는
Blue Hour 마법

마터호른 봉우리와 주변 풍경

고르너그라트 스키장에서 바라본 마터호른 봉우리와 주변 풍경.

스위스 서남부 발레주에 있는 체르마트는 해발고도 1,620m에 있는 산골 리조트마을이다. 마을 주변에는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계절 눈 덮인 마터호른(4,478m)이 거인처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거대한 자연이 내뿜는 마법 같은 순간을 체험할 수 있다. 체르마트에서 북쪽으로 가는 산악열차도 타봤다. 알프스의 정취를 그대로 전해주는 코스다.

최상의 설질 자랑하는 코스

체르마트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터호른은 알프스 4,000m급 고봉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등정됐을 만큼 난공불락의 봉우리였다. 8년 동안 15개 팀이 마터호른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865년 7월 14일. 영국 등반가 에드워드 윔퍼의 등반팀이 마터호른을 세계 최초로 정복하면서 체르마트는 알프스 등반의 베이스캠프 리조트 마을로 유명해졌다.

마터호른 박물관
마터호른 박물관.

체르마트 시내 생모리스 교구 주교좌 성당 앞에는 마터호른 박물관이 있다. 마터호른 등반과 관련된 수많은 컬렉션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윔퍼 등반팀이 사용했던 끊어진 로프다. 당시 등반대는 하산 길에 낙석에 맞아 7명을 묶은 로프가 끊어지면서, 4명이 1,000m 아래 빙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던 슬픈 사연을 담은 유물이다.

알프스 환경보호를 위해 체르마트에는 자동차가 처음 발명된 1885년 이래 자동차의 진입이 허락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신 1988년 최초의 마을 내 공공 전기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그래서 체르마트를 방문할 경우 렌터카는 5km 떨어진 아랫마을 태쉬(Täsch)에 주차를 하고, 12분이 소요되는 산악열차를 타고 가야 한다.

체르마트에 겨울이 오면 세 개의 스키장이 문을 연다. 총 코스 길이 360km로 최상급 설질을 자랑한다. 수네가-로트호른, 고르너그라트-슈톡호른, 슈바르츠제&마테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등이 그런 스키장이다. 스노우보더와 프리스타일러는 올림픽 꿈나무들이 훈련을 하는 스노우파크 체르마트에서 다양한 테크닉을 연습할 수 있다. 스키장은 11월 1일에 개장해 다음 해 4월 30일까지 운영한다.

고르너그라트 스키장
고르너그라트 스키장에서 코스로 올라가는 방문객들.
체르마트 주변
체르마트 주변 스키장에서는 주변 수목과 마터호른 풍경 등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체르마트 스키장이 특별한 이유는 이탈리아에 있는 스키장까지 국경을 넘나들며 '스키 사파리'를 즐길 수 있기 때문. 마터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와 테오둘파스에서 이탈리아의 스키장까지 스키로 넘나들 수 있다. 스키를 매우 잘 타는 사람이라면 노련한 산악 가이드와 동행해 오프 피스트 헬리스키에도 도전해 볼 수 있다. 이탈리아까지 넘나들 수 있는 스키 패스는 성인 기준 92 스위스 프랑부터다.

스키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설피처럼 생긴 미끄럼방지 스노우 슈를 신고 '체르마트 파노라마 트레일'에 도전해볼 만하다. 트레킹 도중 잔잔한 산정호수에 비친 알프스 봉우리는 '푸른 시간(Blue Hour)'이라고 불리는 겨울의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해 준다. 산에는 고요함이 내려앉고 스키 슬로프가 저멀리 보인다. 심호흡을 하고 여유 있게 걷다 보면 마터호른, 오버가벨호른, 바이스호른 등 알프스 연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수네가 5대 호수 트레킹

체르마트에서 유명한 트레킹 코스는 3곳이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해발 3,883m)인 '마터호른 빙하 파라다이스'에 올라가 빙하 트레일을 즐기거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리펠호수까지 걷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기 있는 코스는 수네가 전망대로 올라가 5개 산정호수를 찾아다니는 트레킹이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 쓰인 마터호른 봉우리가 수정처럼 맑은 호수에 비친 모습은 알프스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체르마트 5대 호수 트레킹(5 Lakes Trekking)을 위해 케이블 철도를 탔다. 땅속 터널을 45도 각도로 상승하는 철도를 타니 10분 만에 '수네가 파라다이스'(2,288m)역에 도착했다. 마터호른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테라스다.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쉰 뒤 다시 곤돌라를 타고 블라우헤르트(2,571m)까지 올라간다. 길목마다 5개 호수 트레킹을 알리는 노란색 표지판이 있어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드디어 첫 번째 호수인 슈텔리제(Stellisee)가 나타났다. 수많은 초콜릿 광고에서 마터호른을 비추는 사진으로 유명한 전설의 호수다. 그런데 구름낀 날씨 탓에 하늘도 호수도 모두 곰탕이다.

마터호른
수네가 5대 호수 트레킹 길에서도 마터호른이 보인다.
곤돌라
체르마트 트레킹 코스를 오가는 곤돌라.

거의 1시간을 기다렸다가 아무래도 구름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 다음 호수로 출발했다. 알프스 3,000~4,000m급 준봉들 사이로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구름들이 폭포수처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장면이다. 알프스에서 구름을 뚫고 신선처럼 나타난 마터호른은 좌선하고 있는 미륵불처럼 보였다.

마터호른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슈텔리제로 되돌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언제 다시 구름에 갇힐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해발 2,500미터 가량의 산길에서 오르막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공기 중 산소가 부족해 숨이 턱턱 차올랐다. 호수로 돌아오니 드디어 보였다. 크리스탈처럼 맑은 호수에 마터호른이 장엄하게 담겨 있었다. 거의 2시간을 기다린 끝의 만남. 날이 흐려 흑백사진 같이 느낌이 깊은 침묵에 빠져들게 했다.

알프스의 구름 속을 부지런히 걷다보니 그린지 호수(2,334m), 그륀호수(2,300m), 에머랄드빛 모스예 호수(2,148m)가 나타났다. 마지막 호수 라이호수(2,232m)에 도착해 바위에 걸터앉아 쉬었다. 수네가 파라다이스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는 이 호수 위에서도 마터호른이 보였다. 굳이 3시간을 걷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지만, 알프스 구름 속의 산책은 다시 얻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체르마트 마을의 야경.
체르마트 마을의 야경.

체르마트 숙소에서 머물 때 가장 매력적인 곳은 바로 베란다다. 시내 어느 곳에서도 4,478m급 마터호른 봉우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해질녘 베란다에 앉아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체르마트 맥주(Zermatt Bier)를 한잔했다. 해가 저물며 빛에 따라, 바람과 구름에 따라 변화하는 마터호른의 모습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야구 축구 생중계보다도 더 큰 흥미를 안겨주었다.

산악 열차타고 빙하 트레킹

알프스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산악열차 여행이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열차는 지붕까지 이어지는 넓은 유리창을 갖췄다. 열차가 달리면 알프스의 봉우리와 호수, 초록빛 들판, 전나무 숲 속에 지어진 샬레(스위스 전통가옥)가 3D 입체화면으로 다가온다.

체르마트에서 북쪽 몽트뢰 방면으로 가면 레만호를 만날 수 있다. 몽트뢰에서 인터라켄 오스트까지 이어지는 3시간 남짓한 구간의 '골든 패스(GoldenPass)' 파노라마 열차. 이 산악기차를 타면 레만호부터 베른 알프스의 정취를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

케이블카 정차역의 카페
글래시어3000 정상에 있는 케이블카 정차역의 카페.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 내부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 내부.

열차를 타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눈 내리기 전 스위스 산 속의 초원은 어떻게 그렇게 깨끗해 보일까. 다른 나라 같으면 잡초도 엉켜있고, 억새가 흔들리고, 잡목과 넝쿨도 우거져 있을 텐데. 스위스 산 속 들판은 잔디를 심어놓은 골프장의 페어웨이처럼 산뜻하다.

소가 풀을 다 뜯어먹어서일까? 그렇다고 저렇게 깔끔할 수 있을까. 자세히 보니 커다란 풀을 깎는 기계가 경사진 산비탈을 다니고 있었다. 깎은 풀 더미는 가축 사료로 쓰기 위해 트럭에 실려 보관창고로 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은, 절대로 자연스럽게 방치된 것이 아니었다. 스위스의 경관을 중요시하는 농업은, 주민과 공무원의 철저한 관리 속에 이뤄지는 '관광인프라'이기도 하다.

몽트뢰에서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를 타고 약 2시간. 그슈타트역에서 내렸다. 콜 뒤 피용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글래시어(Glacier) 3000'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레만호 지역에서 빙하 위를 트레킹할 수 있는 명소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도착하니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역에 도착한다. 그는 국내에서도 경기 화성시 남양읍에 지은 '남양성모성지대성당'을 설계한 것으로 친숙한 건축가다.

현수교(1)
글래시어3000에 설치된 강철 현수교. 이 위를 지나가면서 전망을 둘러볼 수 있다.
현수교(2)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한 강철 현수교.

케이블카 역 뒤편 계단을 오르면 두개의 산봉우리를 잇는 강철 현수교인 '티쏘 피크 워크(Peak Walk by Tissot)'가 있다. 길이 107m, 너비 80cm의 출렁다리를 걷다보면, 산를 넘어오는 바람에 온 몸이 흔들린다. 거센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기도 힘들었다.

다리를 건너 전망대에 서니 눈 덮인 24개 이상의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이거, 융프라우, 마테호른, 그랑 콩뱅은 물론 저 멀리 프랑스 몽블랑까지….

전망대 아래쪽 평원에는 빙하가 펼쳐진다. 푸른 하늘색과 하얀 빙하가 어우러지는 색다른 트레킹 코스다. 이곳 빙하에는 크레바스가 없어서 안전하다. 5월부터 9월까지는 '알파인 코스터(총 1km)'가 운행되기도 한다. 최대 시속 40km로 질주하며, 520° 회전과 급커브와 웨이브, 6m나 솟구치기도 해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빙하 속 놀이기구다. 하지만 동절기에는 운행하지 않아 아이들에게는 눈요기로만 보여줄 수 있다.

체르마트 이글루 빌리지
체르마트 이글루 빌리지.
마터호른 빙하 파라다이스의 일부
마터호른 빙하 파라다이스의 일부.

실제로 걸어본 빙하 평원의 곳곳에는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도랑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수천만년 동안 녹지 않는 빙하지대로 유명했던 '글래시어 3000'의 얼음도 기후변화로 거의 다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빙하 끝까지 다녀오는 2시간 코스를 완주하려면 방수가 되는 튼튼한 등산화가 필요했다. 산 정상 케이블카 역에는 르 카르노제 카페가 있다. 알프스 연봉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산 위에서 마시는 따뜻한 핫초코 한잔은 빙하 바람에 떨었던 몸을 녹여주는 특효약처럼 느껴졌다.

  • ARTICLE&PHOTO: 전승훈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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