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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ING TRAVEL

남해의 봄빛, 거제와 통영 희망봉을 닮은 절경
예술의 향취가 묻어나는 곳

이거야말로 거가대교의 진면목이다.
저도를 징검다리로 해서 진해만을 가로지른 사장교가 중 죽도를 무지개처럼 잇는가 싶더니만 이내 사라진다.

거제 통영엔 봄기운이 오래 머문다. 남쪽의 따뜻한 날씨 덕분이다. 그 하이라이트는 작은 섬 지심도. 이맘쯤이면 빨간 동백꽃이 우수수 떨어져 동백숲길을 점점이 수놓는다. 그리고 숲 그늘 짙은 오솔길에서 벗어나 다다른 산마루에선 파란 하늘 푸른 바다를 훈훈한 바닷바람과 함께 즐긴다.

지심도는 하룻밤 묵어야 제격이다. 오후 다섯 시면 배가 끊겨 단절과 소외, 정적과 고요의 본연으로 되돌아가서다. 음력 보름이라면 더 좋을 수 없다. 휘영청 보름달빛에 신비로울 마치 특별한 바다풍광이 펼쳐지기 때문. 통영 봄빛도 다르지 않다. 케이블카로 오른 미륵산에서 다도해 한려수도의 바다와 섬을 보노라니 아지랑이에 눈이 어지럽다. 한강 하구엔 겨울 철새가 여전한데 여기선 갈매기 날개 짓에 봄이 출렁인다. 거제와 통영 시내는 차로 한 시간거리. 거제의 식당 주인들이 장보러 통영을 들락거리는 만큼 두 도시는 이제 하나라 할만도 하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게 있다. 주민의 성정이다. 연륙도 된지 오래라도 애초에 섬 거제에선 섬사람 특유의 억척스러움이 매력. 섬을 아우른 거친 산악과 큰 바다에서 들이닥치는 바람이 그 배경이다. 해변도 고운 모래보단 몽돌 밭. 역사도 거칠었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포로수용소, 흥남철수작전으로 피난 온 '함경도 아바이'(함경도 출신 남자)가 내린 곳이 여기다. 임진왜란 중엔 내내 왜군 치하. 여기에 성을 쌓고 조선을 유린했다. 다도해 한려수도를 낮은 산과 부드러운 구릉이 감싸 안은 통영과는 딴판이다.

하지만 이렇듯 상이해도 이순신이라는 영웅 앞에선 어렵지 않게 하나가 된다. 그 역사에 한 형제처럼 등장해서다. 그 난리를 극복할 수 있었던 핵심. 호남 충청의 곡창을 왜군에게 내주지 않은 것인데 그게 이순신의 업적이다. 왜군기지 부산포와 여수를 잇는 뱃길을 완벽히 차단한 것이다. 왜군이 조선을 점령하자면 대병력을 먹일 군량미 조달이 필수. 당연히 호남 충청을 장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수군에 그 물길이 차단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제와 통영은 그 초입이었다.

이순신은 왜적과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백전백승이었다. 하지만 조선수군은 그렇지 못했다. 뼈아픈 1패 때문인데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던 와중이었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 그 전장은 거제 섬 북쪽의 좁은 물길 칠천량. 원균을 비롯해 무려 1만의 조선수군이 거기서 전사했다. 이 칠천량 전투로 인해 거제는 통영과 극렬하게 대비된다. 통영 앞바다(견내량)이 이순신의 백전백승 상징인 한산대첩 무대여서다. 올 봄 거제 통영을 찾는다면 칠천량과 견내량을 두루 살피며 그 패전과 승전의 이야기도 다시 한 번 새겨주길 바라며 이 글을 쓴다.

거제 여행

몽돌해변
거제도야 말로 거대 장엄한 바위산 하나가 통째로 바다에 빠진 형국. 해변마다 모래 아닌 자갈로 밭을 이룬 건 그 때문이다. 여차마을의 몽돌해변.

대전통영고속도로의 하행 길 막바지. 드디어 왼편으로 물이 보인다. 호수처럼 잔잔한 수면. 하지만 이건 남해다. 여기 바다는 어딜 가도 이렇다. 크고 작은 섬에 갇혀 바다는 호수를 닮았다. 통영서 자란 처녀가 강릉 여행길에 처음으로 동해를 만났다. 그때 한 첫마디, '무슨 바다가 이래'. 그녀에게 수평선만 댕그랗게 놓인 바다는 바다가 아니었다. 첫 행선지는 거제. 방향을 틀어 시내로 향한다. 서울에서 거제 시내까지는 시외버스로 네 시간 남짓. 아침 먹고 막 떠났다면 시장기가 들 즈음 당도한다. 찾은 곳은 멍게비빔밥 전문식당 백만석(거제포로수용소 주차장 옆). 멍게의 바다 내음도 좋지만 함께 낸 생선매운탕에 더 마음이 끌린다.

정원 섬 외도엔 봄기운이 충만했다. 거길 가려면 유람선을 타야 한다. 장승포를 떠난 배는 먼저 해금강을 보여준 뒤 외도로 데려간다. 섬 전체가 정원인 외도에선 게으른 산책을 즐긴다. 그런 뒤 타고 왔던 배로 귀항한다. 유람선이 기암절벽 해금강으로 이동하는 동안 갑판에선 갈매기와 여행자의 유희가 즐겁다. 하얀 갈매기와 파한 하늘의 조화가 아름답다.

외도는 지난 세월에도 크게 변한 게 없다. 울긋불긋 만발한 꽃에 봄 색이 더욱 곱다. 산책로는 언덕마루의 카페에서 선착장을 향해 되돌려진다. 그 카페의 테라스에서 남해의 춘경을 즐긴다. 그 아래로 절벽과 바다, 산책로가 어우러진 풍경. 아프리카대륙 최남단의 희망봉(남아공)과 꼭 닮았다. 그러니 여기서 거길 상상해도 큰 무리가 없다. 테라스에 앉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멀리 절벽 위로 등대가 보인다. 와현 해변(거제)의 서이말 등대다.

해질 녘까지는 한참 남은 이른 오후. 배위에서 바라본 해금강을 이번에는 내려다 볼 곳으로 옮긴다. 우제봉 전망대다. 거긴 해금강관광호텔에서 30분 정도(1km) 동백숲길을 찬찬히 걸어 오른다. 도중 서쪽 바다로 크고 작은 섬이 보인다. 해금강은 갈도라는 섬의 한쪽 면에 발달한 기암절벽. 전망대에선 그 갈도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그뿐이 아니다. 멀리 외도와 서이말 등대도 어렴풋하지만 보인다.

거제의 명물인 해금강. 유람선을 타고 감상한다.
해무에 덮인 해금강(왼편). 우제봉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거제의 모진 역사, 드센 바람 탓은 아니었을지. '바람의 언덕'은 바다 건너 학동해변과 마주한다.

거제에서 여기보다 더 멋진 풍광을 선사하는 곳은 없다. 그럼에도 꼭 한 곳 더 들를 곳이 있다. '바람의 언덕'이다. 한 20년쯤 됐을까. 여기가 이렇게 불리기 전이다. 당시 여긴 긴 풀이 세찬 바람에 한 방향으로 누운 초원의 둔덕. 지금처럼 올망졸망 들어선 카페며 식당으로 마을로 변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인데 내 인내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다. 언덕 위 풍차는 폭탄테러 급의 도발이다. 풍차란 지면이 수면보다 낮아 댐으로 바다를 막아 얻은 땅에서 생존을 일궈온 네덜란드 국민의 고안품. 쉼 없이 고이는 바닷물을 퍼내는 풍력펌프다. 그런데 그게 언덕마루에 있다니. 배가 산을 오른 격이다. 바람의 언덕 앞 바다는 큰 만()의 형국인데 물 건너 마을이 몽돌해안으로 이름난 학동이다. 저녁식사는 거기서 한다.

이튿날 아침. 거제 부산을 잇는 거가대교 쪽으로 향했다. 칠천량을 찾아서다. 달력을 1597년으로 되돌린다. 임진왜란을 도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화친 협의가 깨지자 조선을 다시 침략한다. 정유재란이다. 왜군은 이중첩자를 보내 조선수군의 기습을 유도했다. 이순신은 낌새를 차리고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조정의 생각은 달랐다. 부산포 공격을 닦달했다. 원균은 자신이라면 부산포로 왜군을 치러 나가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순신은 명령불복종으로 탄핵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다. 하지만 전장을 살피고는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출진불가를 보고하는데 도원수 권율은 곤장을 쳐 징벌하고는 출전케 한다. 그게 8월 27일. 조선수군은 부산포까지 나아갔다. 그러다 들이닥친 왜군 지원군에 퇴각. 칠천량에 이를 즈음엔 악천후 속 장거리 이동으로 모두가 탈진했다. 그때 기습을 당하는데 조선수군 1만 이상이 전사했다. 함선도 대부분을 잃었다. 원균도 도주 중 숨졌다. 이게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 유일한 패전이다.

이순신이 의금부에서 풀려난 건 석 달 전. 그는 패전 소식을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휘하에서 백의종군 중 듣는다. 이렇게 해서 제해권은 왜적에게 넘어갔고 전라도 지방이 장악되며 조선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조정은 이순신을 복귀시켜 제해권 탈환을 시도한다. 그 즈음 칠천량 전투 중 달아났던 장수 배설이 배를 몰고 돌아왔고 이순신의 수군은 그 열두 척 배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임진왜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칠천도에는 그 역사를 되새기는 '칠천량 해전 공원'이 있고 그 안에는 역사전시관이 따로 있다. 공원은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마루에 있는데 멍게 양식당 부표가 해상설치 예술품처럼 아름답게 수면을 장식하고 있다. 전시관에서 주목할 것은 조선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의 격군(노를 젓는 수병)이다. 이들이 이순신 전승신화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필승전술은 유리한 위치에 진()을 친 뒤 왜군을 끌어들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우세한 함포로 공격하는 것. 그런데 그 진을 유지하려면 격군의 각별한 노고가 수반됐다. 원균은 그런 격군을 혹사시켜 기습에 원활히 대응하지 못해 패했다. 당시 판옥선의 격군 수는 승선인원(120~130명)의 80%. 노 한 자루에 4, 5명이 매달려 교대로 저었다. 통영을 떠난 배가 칠천도를 지나면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되는 데 그 뱃길은 다대포를 거쳐 부산으로 이어진다. 거가대교(8.2km)는 그 바다의 작은 섬(저도 대죽도 가덕도)과 해저터널(대죽도~가덕도)을 따른다. 칠천도에서도 유람선(거제칠천도 크루즈)이 뜨는데 대통령의 별장 '청해대'가 있던 저도를 오간다.

통영 찾기

등대섬 소매물도
크고 작은 두 섬으로 이어진 매물도. 통영 바다여행에서 만나는 최고비경은 여기 숨겨졌다. 대매물도에선 등대섬 소매물도가 저렇게 다가온다.

케이블카로 오르는 주산 미륵산에선 시내와 항구는 물론 한려수도 바다와 한산도 등 주변 섬까지 통영의 모든 것이 훤히 바라다 볼 수 있다. 이 봄에 통영에 가면 꼭 먹을 게 있으니 '도다리쑥국'이다. 섬에서 찬바람 이기고 어렵싸리 싹을 낸 향내 짙은 어린 쑥을 넣고 도다리 한 마리로 맑게 끓여낸 이 생선국. 통영의 맛으로 내세울 만하다. 하지만 이것도 벌써 '올드 버전'. 통영엔 아직 여행자에게 생소한 맛이 곳곳에 숨어 있다. 바닷장어구이가 대표적이다. 서호시장엔 새벽 5시부터 어부가 갓 잡아온 다양한 생선이 펼쳐지는데 장어는 거기서도 흔한 것 중 하나. 통영사람들은 이걸 그 자리에서 잡아 삼겹살처럼 불판에 구워 소금에 찍어 먹는다.

그런데 이건 민물장어와 달리 생강 채 없이도 얼마든지 먹을 만큼 담백하다. 가격도 민물장어보다 저렴하고. 이렇게 장어구이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통영여객터미널(서호시장 앞)로 가 한산도 행 카페리에 올랐다. 이순신장군이 전투를 지휘했던 제승당(삼도수군통제영)을 향해서다.

제승당은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활약할 당시의 사령부. 그런데 임진왜란 종전 후 삼도수군통제영이 두룡포(통영의 옛 지명)로 옮겨간 후엔 이 제승당과 한산도가 오랫동안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런 한산도를 이순신에 대한 기억과 충무공의 위업을 기리는 역사유적으로 되살린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현재 한산도에는 제승당을 비롯해 한산섬 바다를 정탐하던 수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영당), 대첩문이 있다. 널찍한 마루 평상의 수루에 서면 정면으로 통영 앞바다가 보인다. 카페리와 요트가 수시로 오가는 이 바다.

이순신이 경상좌수영 전라우수영과 더불어 56척 군선으로 학익진을 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수군 토벌명령에 따라 출동한 왜군을 결딴낸 견내량이다. 한산도 부두와 제승당을 오가는 길은 운치만점이다. 바다를 낀 숲 가장자리로 길을 내서다. 그 숲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제승당을 찾았다면 충무사에 들르기도 잊지 말자. 장군 영정에 향을 올리고 예를 표한다면 통영 거제 여행과 제승당 방문의 의미가 살아날 것이다.

이순신장군 영정
제승당내 충무사의 이순신장군 영정.
세병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세병관.

통영은 애초 지명이 아니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400년 가까이 이렇게 불리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본래는 두룡포(頭龍浦)다. 통제영은 작지 않은 규모의 성이다. 그 중심은 세병관인데 건물 옆에 통영의 옛 지도가 있다. 그걸 보면 두룡포라는 지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형 자체가 오른 편에 머리를 둔 용의 모습이어서다.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이 들어선 임진왜란 종전 6년 후. 선조는 삼도수군을 통제사 지휘 하에 두는 통합군 체계가 효과적이었다고 판단, 삼도수군통제영을 두룡포에 두도록 했다. 그리고 아예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로 구축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성은 크게 훼손당했다. 일제는 성벽을 허물어 그 돌을 건축자재로 쓰고 임금에게 예를 올리기 위해 건축(1605년)한 세병관은 학교 교사로 이용했다. 물론 지금은 통영시와 시민의 노력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런 통제영에서도 백미는 조선시대 목조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큰 세병관. 현판의 글씨가 무려 2m에 달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통제사의 위상을 나타낸다. 놀라지 마시라. 삼도수군통제사는 조선시대에 그 어떤 관직보다도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우선 전라와 경상 좌우수영과 충청수영 등 조선의 세 바다 수군을 모두 관할했다. 그런데 각 수영의 최고지휘관인 절도사는 군권은 물론이고 행정권과 사법권에 조세징수권까지 행사했다. 그런데 삼도수군통제사는 이 절도사를 거느렸으니 동급(종2품)인 관찰사(조선 팔도의 각도 최고 수장)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삼도수군통제사(영)는 1593년 시작돼 1875년 고종의 현대식 군대 창설로 폐영될 때까지 282년간 존속했는데 1대 이순신 2대 원균부터 209대까지 이어졌다.

통영이 다양한 물산(갓 소반 부채 등)으로 이름난 것도 통제영 유산이다. 통제영은 자체에 열두 공방을 두고 그걸 만들고 팔아 운영비를 충당했다. 그 소비처는 전국. 대원군도 통영갓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만든 물건의 품질이 최상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윤이상(1917~1995)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의 탄생도 그 배경은 통제영. 매일 통제사의 출근마다 왕궁음악이 연주됐고 매달 궐패(세병관 중앙에 마련된 임금의 좌석)의식을 치를 때도 빠지지 않던 것이 예악인 만큼 통영 주민은 한양도성보다도 더 예술의 향취를 가까이서 지속적으로 즐겼던 덕분이다. 그런 예술의 향기와 한양의 고급문화가 중임 없이 2년마다 어김없이 부임한 새 통제사와 가솔 및 부하들에 의해 수백 년간 유입된 만큼 통영의 문화수준은 현격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유치진(1905~1974) 유치환(1908~1967)형제나 시인 김춘수(1922~2004),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 같은 문인이 속출한 것이나 화가 전혁림(1916~2010)과 중요무형문화재 김봉룡(1902~1994 나전칠기 공예보유자), 옻칠그림 창시자 김성수(86) 같은 이가 태어난 것도 그런 데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윤이상은 일제강점기에 여기 있던 신청(神廳 악공조합)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또한 소목장인이었다.

해안산책로
통영국제음악당(오른편)과 스탠포드호텔. 물가로 해안산책로가 있다.
두룡포
통영 지형은 이렇듯 용을 빼어 닮았다. 그래서 애초부터 '두룡포'라 불렸다.

그런 만큼 통영 여행길에선 이런 인물과 만남도 기대된다. 박경리와 윤이상은 그들의 기념관에서, 전혁림은 미술관에서다. 그런데 전혁림의 그림은 윤이상을 기념해 지은 통영국제음악당 옆 스탠포드호텔의 로비에도 여러 점 걸려있다. 통영국제음악당 야외에는 베를린에서 영면 중 귀향한 윤이상의 유해로 조성한 묘소도 있다.

통영 중심
남망산(정면) 아래 호수 같은 저 강구안(바다)을 둘러싼 여기가 통영 중심.

Travel Information

찾아가기

거제와 통영 여행은 두 곳에서 하룻밤씩 묵는 2박3일 일정을 권한다. 교통편도 장거리 손수운전보다는 '시외버스 이동 + 현지 렌터카'방식을 추천한다. 서울(남부터미널, 상봉터미널)~거제 시외버스는 네 시간 소요. 유람선을 타려면 반드시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맛집

거제에선 멍게비빔밥을 내는 '백만석' 식당(거제시 상문동 계룡로 47 / 055-638-3300)과 해송횟집(학동해변 / 055-636-2878)을, 통영 맛집으로는 '다담아 해물뚝배기'(통영여객선터미널 부근 항남동 / 055-648-3558)와 만성복집(서호시장 안)을 권한다. 그리고 바닷장어구이는 '어가촌'(통영시 봉평동 해평5길 105 / 055-645-7990)에서 맛본다. 식사 마무리는 장어탕을 추천한다. 통영의 향토주막인 다찌집(1인분씩 계산하는 술과 안주상 차림 주점)으로는 '벅수다찌'(동충2길 41-5 / 055-641-4684)가 좋다. 예약은 받지 않는다.

  • WRITER: 조성하 여행컨설턴트그룹 '여인숙' 대표
  • PHOTO: 조성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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