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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WALK

미각과 후각이 끄는 마차 타고 떠나는 100년 전 시간여행 광주 '1913송정역시장'

1913송정역시장 입구

1913송정역시장 입구.

100년이 주는 의미는 묘하다. 장수(長壽)를 갈망하는 인간에게는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희망의 세월이고, 역사에서의 세기(世紀)는 비슷한 연대에 발생한 몇몇 사건을 한데 묶어 배우는 한낱 짧은 기간이다. 그래서일까. '명심보감' 존심(存心)편은 '인무백세인 왕작천년계(人無百歲人 枉作千年計)'라고 인간을 깨우친다. 100살을 사는 사람은 드문데 부질없이 1,000년의 계획을 세우는 게 인간이다. 100여 년 전 일제가 한반도에 마수를 드리우던 시절, 소박한 사람들의 생업 현장을 걷다 보면 이런저런 덧없는 인생사도 뒤따라온다.

광주 사람이 아니더라도 광주를 방문하거나 상경하는 열차 시간이 조금 남았다면 '1913송정역시장'을 들러보자. KTX 광주송정역을 나와 큰길을 건너면 바로 나온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높아봐야 2층 건물들이 시장 양측으로 200m가량 어깨를 맞댄 채 일()자로 쭉 늘어선 모습이 푸근하다. 건물에는 200여 점포가 둥지를 틀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시절 흑백 사진에서나 등장할 법한 궁서체의 페인트 벗겨진 간판은 우리를 110년 전 그날로 안내한다.

1913송정역시장 역사 사진
1913송정역시장이 걸어온 발자취를 사진, 만화 등의 이미지를 잘 활용해 전시해 놓아 시장의 역사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물가 주변 소나무 숲, '송정(松汀)'

광주송정역의 원래 이름은 송정리역이다. 1913년 10월 1일 전남 목포와 송정리 구간 호남선이 개통되며 이 역이 생겼다. 당시 행정구역은 전남 광산군 송정리. 광주역이 없었던 만큼 송정리역은 광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역이 생기자 자연스레 유동인구도 많아졌고, 역을 중심으로 '매일송정역전시장'이 생겼다. 1988년 송정리가 전남도에서 광주시로 편입됐고, 2009년 광주송정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2015년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이 역은 이제 광주의 대표역이 됐다.

사실 전국에 '송정'이란 명칭은 꽤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소나무 숲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의 '송정(松亭)'으로 쓰인다. 그러나 '1913송정역시장'의 '송정(松汀)'은 물가 주변 소나무 숲을 의미한다. 송정리 지역은 영산강 지류인 황룡강과 극락강의 물줄기가 교차하는 곳으로, 이 지류는 나주를 통과해 나주평야를 적신다.

연도 표석
바닥에 적힌 연도 표석.

시장은 2016년에 1900년대 복고풍 전통시장으로 새 단장했다. 그리고 그때 103년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시장 이름을 '1913송정역시장'으로 바꿨다. 시장의 '탄생 연도'를 넣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시장을 걷다 보면 바닥에 연도가 적힌 표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숫자가 가리키는 건물의 완공 연도다. 시장 바닥을 보고 건물을 올려다보면 마치 문화해설사가 고단한 삶의 흔적을 설명해주는 듯하다.

가게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건물 자체 리모델링은 최소화했다. 대신 간판 디자인은 상인들의 추억을 담았다. 아주 생소한 오래전 한문체 간판이 아니라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추억의 간판들이다. 어릴 적 추억을 '살짝' 끄집어내는 만큼 친근한 느낌을 준다. 방문객들은 연신 휴대전화 카메라 앱을 켠다.

1913카페
1913카페에 앉아 유리창 너머 시장을 보고 있노라면 미각과 후각이 끄는 30여 년 전으로 여행 온 것만 같다.
추억사진관
시장의 배경과 걸맞는 추억사진관.

점포마다 저마다의 역사를 담은 '스토리 보드'도 있다. 점포명과 장사 시작 연도를 표시한 '히스토리 월'은 각 점포의 홍보물이자 역사 속으로 관광객을 태워가는 타임머신이다. 100여 년간 줄곧 시장을 지킨 36개 상점의 간판 글씨와 내부 모습은 100년 가게 상인들의 철학과 정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국수 공장을 하시던 시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며느리가 운영하는 '서울떡방앗간'의 기계는 50년 동안 늘 새벽이면 돌아간다. 늘어지지 않고 쫄깃쫄깃한 식감이 일품인 국수는 선물용으로도 제격이다. 요즘 어디 방앗간 보는 게 쉬운 일인가. 상인에게는 삶의 터전이지만 방문객에게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선물한다.

옛날통닭, 과일양갱, 호두타르트…

1967년 생선가게로 시작해 1975년 고향 이름으로 명명한 '신흥상회'는 남도지방 대표적 잔치음식인 홍어회, 홍어무침을 파는 홍어 전문점이었다. 지금은 다른 생선도 판다. 영광굴비와 명태 코다리가 몇 두름씩 내걸린 모습이 목가적이다.

'무등산 수박빵', '햇살 손만두', '서울장수국수', '중앙통닭', '개미네 방앗간' 등 간판부터 정겹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튀겨주는 옛날통닭을 노란색 색소로 멋을 낸 슬러시와 함께 먹다 보면 어릴 적 시골 시장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군침 도는 주전부리, 한 끼 요기가 되는 전통음식, 지역 수제맥주와 우리밀로 만든 피자 등 다양한 음식은 소포장해서 기차에서 즐길 수도 있다. 직접 농사지은 곡물로 만든 참기름 등 부담 없는 선물용 특산품도 가득하다.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시장이지만 젊은이들의 발걸음도 이어진다. 전통시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청년창업자들이 이 곳 시장에 대거 가게를 열었기 때문.

잡업스토어 누구나가게
날마다 새로운 먹거리와 살거리를 제공하는 팝업스토어 '누구나가게'.
송정역시장 개미네 방앗간
길 건너 주상복합단지와 신구조화를 이루며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1913송정역시장.

시기와 상황에 따라 변신하는 팝업스토어 '누구나가게'는 날마다 새로운 먹거리와 살거리를 제공한다. 젊은이들이 장사 경험을 쌓기에는 제격이다. 요즘은 예비 청년창업자들의 사전 검증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알록달록 '탱탱볼'처럼 생긴 과일양갱을 파는 '갱소년', 달콤한 호두타르트가 일품인 '황금호두과자', 연유식빵과 먹물치즈식빵 등 식빵 나오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대기 줄이 늘어지는 '또아식빵', 팽이버섯을 감싼 베이컨말이가 식욕을 돋우는 '불꼬챙이' 가게를 지날 때면 눈과 코가 즐겁다. 역사가 주는 푸근한 품에서 청년들의 푸릇한 열정이 느껴진다.

사람들이 오고 간 문화교류의 장

예로부터 송정역 주변은 각양각색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서울 손님'은 물론이고, 송정리 주민과 인근 전남지역 주민들로 역 주변은 늘 왁자지껄했고, 낮이고 밤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갔다. '1913송정역시장'은 단순히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라 문화교류의 장이다. '1913송정역시장'도 이러한 지리적 장점을 살려 전통시장을 활성화시켰다. 지역 문화를 토대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길거리 공연 중심의 볼거리를 만들었고, 야시장 등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를 전통시장에 접목해 '문화체험형 시장'으로 변화를 꾀했다. 특히 야간 조명이 아름다워 '1913송정역시장' 야경은 '인생 컷' 단골 촬영지가 됐다.

야외쉼터
광주송정역 제2대합실로 활용하는 야외쉼터.
광주송정역
광주송정역(역에서 시장은 걸어서 5분 거리).

기차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시장의 특성도 적극 살렸다. 장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기차시간에 늦는 일도 없다. 국내 최초로 시장의 야외 쉼터가 송정역 제2 대합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실시간 열차시각 알림 전광판을 세웠다. 바로 옆에는 무료로 이용 가능한 무인 물품보관함을 갖춰 이용객들이 시장을 맘 편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시장 곳곳에 남는 공간에는 편의시설인 쉼터와 공중화장실 등 고객을 위한 공용공간을 만들었다. 쉼터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다리를 뻗으면 여행의 피로도 말끔히 사라진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안심관광지'여서 더욱 든든하다. 미각과 후각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시간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새 두 손엔 가족에게 줄 선물이 가득하지만 역으로 향하는 발걸음만큼은 더 가벼워진다.

  • 장소 광주 광산구 송정로 8번길 33
  • 문의 062-942-1914
  • 영업 시간 23:00에 영업종료(정기휴무-매월 둘째 주 월요일, 자율 휴무-매월 넷째 주 월요일)
  • EDITOR & PHOTO: 황승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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