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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의사 양성을 위해 헌신하다 여성의학 발전의 숨은 공로자
김탁원·길정희 부부

왼쪽부터 길정희, 로제타 홀, 김탁원 선생

일제강점기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설립에 앞장 선 3명의 의사들. 왼쪽부터 길정희, 로제타 홀, 김탁원 선생이다. 김탁원(오른쪽 위) 선생은 한국 최초의 신경정신과 의사이며, 길정희 선생은 산부인과 의사로 평생 여성 의료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부부 의사'였던 김탁원·길정희 선생은 로제타 홀 여사와 함께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창립에 앞장섰다. 이 기관이 훗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다시 태어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 여의사 양성의 기틀을 놓은 이들의 삶을 돌아본다.

김탁원(1898~1939)·길정희(1899~1990) 선생은 1928년 9월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여성 의학교육기관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설립의 주역이다.

당시만 해도 사회 전반에 남녀유별 사상이 퍼져 있었다. 여성 환자가 남성 의사에게 자기 몸을 보이고 진료를 받기란 쉽지 않았다. 김탁원·길정희 선생은 이런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의료 선교사 로제타 홀(1865~1951) 여사와 함께 여성이 의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홀 여사가 미국으로 귀국한 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인수해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하고,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자 우석 김종익(1886~1937) 선생 등 독지가들에게 기부금을 받아 학교 운영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선각자들에 의해 탄생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1933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거쳐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발전했고, 광복 후 서울여자의과대학, 수도의과대학, 우석대 의과대학 등을 거쳐 지금의 고려대 의과대학이 됐다. 이 발전의 징검다리가 된 두 사람의 삶을 좀 더 깊이 살펴보자.

민족을 위한 한 길 현당(玄堂) 김탁원(金鐸遠) 선생

김탁원 선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반 시절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체포돼 1년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여파로 제적까지 당했으나 당시 교장의 도움으로 복교해 동기생들보다 2년 늦은 1921년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일본 도쿄 국립정신병원, 중국 베이징 협화의원 등에서 일하며 전문성을 쌓았고 한국 최초의 신경정신과 의사가 된다.

김탁원 선생은 귀국해 병원을 낸 뒤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치료해줬다는 이유로 다시 옥고를 치르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27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폐흡충증 치료를 받던 환자가 집단적으로 사망하거나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환자들의 폐렴이 갑자기 급성으로 변해 발생한 일"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여론이 들끓었고, 동아일보는 "일제가 폐흡충증 치료제인 '에메틴'의 효력을 확인하고자 인체 실험을 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탁원 선생은 당시 한국인 의사들이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 대표로 현장에 파견돼 치밀한 조사 끝에 폐흡충증 환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에메틴 중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일제는 폐흡충증 환자 105명에게 17일간 계속 에메틴을 주사했다. 그 결과 5명 사망, 6명 중태, 93명 마비라는 결과가 발생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함경남도 영흥, 전라남도 해남 등지에서 광범위한 반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앞장선 민족주의자였기에, 김탁원 선생은 여성 의학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하고도 운영 및 교육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는 것에 고통을 느끼다 1939년 42세의 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다.

여성 의료인 양성을 향한 큰 뜻 운산(雲山) 길정희(吉貞姬)

길정희 선생은 10대 초반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 손에서 자랐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조부는 의학에 뜻을 둔 길정희 선생이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대학 시절 홀 여사와 만나 여의사 양성에 대해 의논했던 길정희 선생은 1923년 귀국 뒤 홀 여사가 운영하는 동대문부인병원에 자리를 잡는다.

1925년 김탁원 선생과 결혼한 뒤에는 세 사람이 뜻을 모아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창립을 이뤄낸다. 당시 소장은 홀 여사, 부소장은 길정희 선생이었다. 1933년 홀 여사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길정희 선생은 남편과 함께 강습소를 인수해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편했다. 당시 기독교 재단의 지원조차 끊겨 힘겨운 상황에서도 박순정, 임용화 등 첫번째 의사시험 합격자를 비롯해 총 13명의 합격자를 배출하는 등 우수한 성과를 냈다.

현판
교사

1938년 개교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현판(왼쪽)과 교사. 경성여의전은 많은 선각자들의 숭고한 정신과 헌신, 기부가 밑거름이 돼 탄생했다.

이후 강습소를 한 단계 발전시키고자 우석 김종익 선생 등 독지가들의 기부를 이끌어낸 것도 이들 부부였다. 교육 사업과 여의사 양성에 뜻을 품고 있던 우석은 이들을 만난 뒤 유언을 통해 여성 의학교육기관 건립에 65만 원을 희사했다.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0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 돈을 바탕으로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경성여의전)가 공식 출범했다. 돌아보면 의료선교사 홀 여사가 한국에 뿌린 여의사 양성의 씨앗이 우석의 기부를 통해 전문학교 건립으로 이어진 것은 김탁원·길정희 부부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성여의전은 이후 서울여자의과대학, 수도의과대학, 우석대 의과대학을 거쳐 1971년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고려대의료원의 역사는 선각자들의 시대를 앞선 숭고한 정신, 인류를 위한 헌신과 기부의 결과다. 그 역사를 돌아보며 김탁원·길정희 부부의 삶 또한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 EDITOR: 김건희
  • 자료사진: 고려대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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