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바로가기본문 내용 바로가기
HEALING TRAVEL

일본 소도시 여행 사람 냄새 나는 옛길 걸으며 즐기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세토오하시 다리 풍경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에서 카가와현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12.3km) 세토오하시 다리 풍경.
1988년 완공된 이 다리는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하며, 웅대한 입체감으로 세토 내해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일본 여행의 참맛은 번잡한 대도시보다 지방 소도시를 찾았을 때 더 잘 느낄 수 있다.
마을 전통주택에서 자고, 지방 특산물로 만든 요리를 먹는 데서 얻는 기쁨이 있다.
발 닿는 곳 어디에나 있는 세련된 디자인과 정갈한 분위기의 가게들도 쉴새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만든다.

에도시대 풍경, 구라시키 미관지구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는 일본 최초의 방직공장이 있던 도시다. 시내 중심에 청계천만한 작은 개울이 흐른다. 개울가에는 수양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고, 백조가 한가롭게 노니는 수면 위로 작은 배들이 떠다닌다. 에도시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느낌이다.

2~3층으로 된 일본 전통 목조가옥이 밀집한 골목길도 이어진다. 그 사이를 바퀴 2개가 달린 인력거가 다닌다. 골목길을 걸으며 헌책방과 민예품 판매장, 옷가게 등에 들어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구라시키 여행의 참맛이다.

구라시키 미관지구 운하
에도시대를 연상케 하는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미관지구 운하 풍경.

강변을 걷다보면 오하라(大原) 미술관이 보인다. 전통가옥 사이에 그리스 신전처럼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진 석조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1930년 문을 연 일본 최초의 근대미술관이자 사립미술관이다.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를 비롯해 고갱, 마네, 모네,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칸딘스키 등 세계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거장의 작품들이 이 작은 미술관에 모여 있다.

오하라미술관
일본 최초의 근대미술관인 오하라미술관.
관광용 인력거
구라시키 미관지구 골목길에 다니는 관광용 인력거.

오하라미술관이 탄생한 배경에는 두 친구의 깊은 우정이 있다. 구라시키방직(倉紡) 창업자인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1881~1943)와 그의 동갑내기 친구인 화가 고지마 토라지로(兒島虎次郞·1881~1929). 오하라는 고지마를 5년에 걸쳐 세 번이나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한다.

든든한 후원자가 돼준 셈이다. 고지마는 오하라를 위해 유럽에서 명작들을 수집했다. 오하라미술관에는 고지마가 1911년 그린 '기모노를 입은 벨기에 여인'도 전시돼 있다. 안타깝게도 고지마는 48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930년, 오하라는 친구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친구가 수집한 컬렉션 위주로 미술관을 설립했다고 한다.

구라시키 골목길을 걷다보면 빨간 벽돌로 된 창고건물도 만나게 된다. 1889년 지어진 일본 최초의 방직공장이다. 현재는 '아이비 스퀘어(Ivy Square)'라고 불리는 서양식 호텔과 전시장, 식당가로 구성된 복합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방직공장이 있었기 때문인지 구라시키에는 푸른색 질긴 면직물인 데님(denim)으로 만든 패션 소품을 파는 가게가 많다. 일본 상점들은 '영업 중'을 표시하는 노렌(暖簾·상점 앞에 쳐놓는 천)을 문 앞에 걸어놓는 데, 이곳에서는 데님 소재의 푸른 천으로 만든 노렌도 자주 눈에 띈다.

데님스트리트
청바지로 유명한 구라시키 데님스트리트 가게.
관광객들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구라시키 역사지구를 걷는 관광객들. 우리나라 서울 익선동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방직공장 창고 바로 앞에 있는 '데님 연구소'에는 재봉틀 작업대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미니어처 청바지 모양의 열쇠고리를 기념품으로 샀다. 실제 청바지처럼 스크래치, 패치워크 작업을 한 데님 열쇠고리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구라시키는 MZ세대의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놀이용으로 인기 높은 문구용품 마스킹테이프(mt)의 발상지로도 잘 알려진 도시다. 마스킹테이프는 100년 전 차량에 페인트를 칠할 때 페인트가 묻으면 안 되는 부위에 붙이는 용도로 개발됐다고 한다. 그런데 제조사 '카모이' 관계자가 마스킹테이프를 인테리어 도구로 사용하는 고객을 만난 것을 계기로, 공업용 제품을 문구용으로 업그레이드했다는 스토리가 전해진다.

2023년은 카모이 창립 100주년으로, 구라시키의 모든 기념품 상점과 화장품·비누·옷 등을 파는 가게 쇼윈도에는 '카모이 mt 100주년'을 알리는 깃발이 달려 있어 여행자의 눈길을 끌었다.

애니메이션으로 부활한 염전마을

일본 히로시마현 다케하라(竹原)는 에도시대에 소금과 사케 주조업, 대나무 죽세공품 등으로 번성했던 항구마을이다. '히로시마의 작은 교토'로 불릴 정도로 전통가옥이 잘 보존돼 있는 게 특징이다.

세월이 흘러 염전이 사라지고, 소금생산량이 대폭 줄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고향을 떠나자 다케하라는 젊은이의 발길을 다시 불러오고자 TV 애니메이션을 활용했다.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영화보다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인기가 더 높다. 다케하라 마을을 배경으로 사진클럽 여고생들의 우정을 그린 애니메이션 '타마유라(たまゆら)'가 인기를 끌면서 이 소도시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다케하라 곳곳에는 이 애니메이션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다케하라의 명소와 건물 모습을 실사처럼 그대로 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다케하라 거리의 끝자락에는 조그마한 사당이 있는데, 이곳은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촬영지로 유명하다.

'타마유라' 포스터
염전마을 다케하라를 부활시킨 TV 애니메이션 '타마유라' 포스터.
니포니아 호텔
다케하라의 오래된 민가를 개조한 마을 분산형 숙박업소 '니포니아 호텔'.

다케하라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지역 활성화 아이디어는 마을 분산형 숙박업소 '니포니아(Nipponia) 호텔'이다. 시골의 비어 있는 고민가(古民家)를 활용해 조성한 마을 호텔로, 체크인은 '호텔 리셉션'이라고 써놓은 집에서 하고, 숙박은 골목 끝에 있는 객실 A동에서 하면서 레스토랑은 또 다른 골목으로 가는 식으로 마을 전체를 활용해 운영한다.

고객은 체크인 후 마을길을 걸으며 숙소를 찾고, 식사를 하고자 또 작은 골목길을 찾아다니며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오래된 빈집을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개조한 호텔 내부도 신선하다. 인구 감소로 쇠락해가는 농촌마을 전체를 하나의 부티크 호텔 세계관으로 만들어버린 '로컬 브랜딩' 우수 사례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경북 안동이나 경주 등에서 한옥스테이, 고택스테이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런 곳에 가면 종갓집처럼 크고 멋진 한옥 건물에서 묵을 수 있지만,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다 보니 서비스 질은 천차만별이다. 니포니아 호텔은 한국의 고택스테이와 비교할 때 겉으로 보기엔 볼 품 없어 보일 수 있는 목조주택이다. 하지만 기업이 운영하다 보니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질이 뛰어난 느낌이었다. 니포니아 호텔은 일본 전역에서 전통 민가를 활용한 호텔 10여 곳을 운영하며, 성·신사·절 등 문화재를 활용한 숙박시설도 13곳 운영한다.

대나무 공중전화 박스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일본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의 대나무 공중전화 박스.
다케하라 마을 풍경
염전이 있던 시절의 다케하라 마을 풍경.

다케하라는 에도~메이지 시대 건축물을 잘 보존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지로도 유명하다. '다케하라 미치나미 보존지구'는 식당과 커피숍, 기념품 가게, 서예 강습교실, 도예공방, 양조장 등으로 활용되는 시골 주택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대나무숲이 유명해 전남 담양과 자매결연도 맺었다. 거리 곳곳에서 대나무 공예품이 눈에 띈다. 공중전화 박스를 대나무로 장식하고, 마을 수로 위에 아치형 대나무 공예품을 배치해 안전과 멋스러움을 한 번에 잡았다. 19세기에 개업한 사케 주조장에 있는 사카쿠라 교류관(酒蔵交流館)에서는 전통 주조장 견학과 시음, 술잔과 도자기 등 공예품 쇼핑도 즐길 수 있다.

자전거족과 고양이 집사의 성지

일본에는 자전거족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소도시도 있다. 약 70km에 이르는 자전거 코스 '시마나미카이도(しまなみ海道)'의 출발점인 히로시마현 오노미치(尾道)다.

시마나미카이도는 일본 규슈와 혼슈, 시코쿠 사이에 있는 작은 바다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8개 다리를 가로질러 조성된 코스다. 자전거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의 풍광이 환상적이라 미국 CNN이 선정한 세계 7대 자전거 코스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이클링 숙련자는 3~4시간이면 완주할 수 있어 전세계 자전거족이 몰려든다.

오노미치는 한때 해운물류의 집결지로 번성했지만, 1960년대 이후 주변 공업지역으로 기업과 사람이 빠져나가면서 도시의 매력을 잃어갔다. 이곳에 남은 약 2,000㎡ 크기의 콘크리트 창고를 개조해 만든 'U2'에는 숙박시설과 레스토랑, 카페, 바, 기념품숍 등이 모여 있다. 자전거 브랜드 자이언트(Giant) 판매점까지 있으니 '자전거족을 위한 복합시설'이라 할 만하다. 자전거족들은 이곳에서 숙박하면서 밥 먹고, 쇼핑하고, 와인이나 위스키를 즐기고, 자전거 수리도 한다.

오노미치 시내 전경
센코지산 산책길에서 바라보이는 텐네이지 삼중탑과 오노미치 시내 전경.
U2
오노미치 항구 창고를 개조해 만든 자전거족을 위한 복합시설 'U2'.

오노미치에 갔다면 로프웨이를 타고 센코지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전망대에 서면 세토 내해의 섬들과 바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내려올 때는 '문학의 길'로 꾸며진 산길을 걷는 것이 좋다. 텐네이지 삼중탑과 우시토라 신사까지 약 200m 구간에 '고양이 오솔길(猫の細道)'이 있다. 차돌 위에 고양이 얼굴이 그린 '복돌 고양이(福石猫)'가 계단과 담장, 풀숲 곳곳에 숨어 있다.

실제 고양이처럼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사람들을 지켜보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이 고양이 오브제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예술가 소노야마 슌지(園山春二)가 1998년부터 제작한 것들이다.

복돌 고양이
오노미치 고양이 오솔길에 숨어 있는 '복돌 고양이'.
고양이 카페
오노미치 센코지산 문학의 길에 있는 고양이 카페.

슌지는 담벼락이나 길바닥의 시멘트가 갈라진 틈 모양을 이용해 고양이 몸통이나 얼굴, 발바닥 등을 그려 넣었다. 이 길에서는 실제 고양이도 만나볼 수 있다. 한낮의 고양이들은 관광객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늘어져 잠을 자기에 바쁘다.

예쁜 복돌 고양이가 늘어선 '고양이 오솔길'이 입소문을 타면서 오노미치는 고양이 집사라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성지가 됐다. 그 덕에 사람들이 떠나간 도심 산동네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고, 빈집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이나 카페, 공방도 하나둘 생겨났다. 오노미치의 고양이 길은 소니 미러리스 카메라 CF에 배경으로 나오기도 했다. 오노미치 시내 카페거리에도 고양이 캐릭터를 활용한 카페와 기념품 숍이 많아 '카와이(귀여워)~!'라는 감탄사를 부른다.

  • ARTICLE: 전승훈 동아일보 기자
  • PHOTO: 전승훈 동아일보 기자, 셔터스톡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