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함께 걷는 힐링 쉼터 구로명품올레길
구로명품올레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안양천 징검다리. 건너가기에 무리는 없지만 천천히 조심조심 걷는 게 좋다.
살다보면 때때로 어깨를 짓누르는 번민에 시달릴 때가 있다. 이때 고민의 무게를 훌훌 털어내는 최고의 방법은 걷는 것이다. 목적지 없이 무념무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차츰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살이 에이는 맹추위가 아니라면 올겨울 웅크린 몸을 펴고 하늘을 바라보며 걸어보는 게 어떨까. 서울 구로구에 최적의 공간이 있다.
"희망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레 길이 되는 것이다."
중국 작가 노신(魯迅, 1881~1936)이 쓴 소설 '고향'의 한 대목이다. 길은 사람이 만든다. 제주 방언으로 '큰 길에서 집 대문까지 연결된 아주 좁은 골목 비슷한 길'을 의미하는 '올레'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길이다.
2007년 제주올레 1코스가 개발된 이래로 '제주올레길'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하나의 상표로 자리매김했다. 그 여세를 몰아 전국 각지에 금오산 올레길, 팔공산 올레길 등 도보여행 코스가 생겨났다. 이후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걷기 여행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도심 속 산책로도 많아졌다.
개나리·진달래·벚꽃이 만발한 봄, 녹음이 우거진 여름, 울긋불긋 단풍이 감성을 자극하는 가을이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를 걷는 게 좋을 것이다. 겨울의 도보 여행자에게는 도시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구로명품올레길을 추천한다.
구로명품올레길은 정갈하게 조성된 관광 트레킹 코스가 아니다. '타임머신 산책 종합세트'라 할 만하다. 쭉쭉 뻗은 현대식 빌딩숲 사이를 걷다 보면 1990년대가 연상되는 왁자지껄한 시장이 나타난다. 어느 골목에선가 1980년대 어린이들이 뛰어놀았을 법한 추억 속 언덕도 만날 수 있다. 넉넉한 하천 풍경과 산뜻한 소나무 향기, 부드러운 흙길이 오감을 자극하며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노을이 우수에 찬 듯하다.
마음이 더 끌리는 곳을 향해 걸으면 된다.
도심 속 힐링 공간으로 손색없는 구로명품올레길은 2011년 11월 조성을 시작해 2014년 5월 완공됐다. 산림형(10.5㎞), 하천형(10.5㎞), 도심형(7.5㎞) 총 3가지 테마 안에 9개 코스가 마련돼 있다. 산림형 1코스(계남근린공원), 2코스(매봉산~와룡산), 3코스(천왕산), 4코스(개웅산)는 이름 그대로 산 중심이다. 하천형 1코스(구로1교), 2코스(안양천 합수부), 3코스(목감천)에서는 평화로운 강 풍경이 시선을 채운다. 도심형 1코스(가마산로), 2코스(중앙로)는 고려대구로병원과 바로 연결돼 있다. 병원에 들른 날 도심형으로 시작해 산림형이나 하천형으로 이어가며 '걷는 재미'를 즐기기 좋다.
도심에서 만나는 인간미 넘치는 풍경
구로명품올레길 도심형 코스의 시작점은 수도권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3번 출구다. 반듯한 빌딩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에서 남구로초등학교 쪽 사이 길로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옛 서울의 모습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순식간에 추억 여행을 떠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구로명품올레길 이정표를 따라 걷다가 남구로역 4번 출구를 지나면 허기를 달래줄 중국 식당이 즐비하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오른쪽으로 고려대구로병원 정문이 나온다. 여기서 솔길어린이공원 쪽으로 향하면 또 다시 분위기가 달라진다. 지하보도와 구로차량사업소를 지나는 길은 흡사 유럽의 어느 소도시 같다. 직선으로 뻗지 않은 사선의 지하보도와 긴 벽으로 이어진 길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어 보도육교를 지나면 자연이 가득한 공간, 신구로유수지생태공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서울 구로구 안양천 일대는 예로부터 여름철 집중호우가 오면 물에 잠기는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1960년대 말 안양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빗물을 가두어 놓을 목적으로 인공저수지인 신구로유수지를 조성했다. 문제는 유수지가 여름을 제외하면 대부분 공터로 방치됐다는 점. 1980년대 초 안양천 재정비 사업이 대대적으로 시작된 뒤엔 아예 도심 속 버려진 공간처럼 남겨졌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생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곳에 생태공원이 조성되고,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민에게 개방됐다.
신구로유수지생태공원은 안양천과 서부간선도로 사이에 있어 접근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붉은머리오목눈이, 쇠오리, 왜가리를 비롯한 다양한 동·식물이 둥지를 틀고 있어 한번 찾으면 누구나 만족할 만하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걷기의 매력
신구로유수지를 가로질러 나선형 보도육교와 구름다리를 지나면 이제 발걸음은 안양천에 다다른다. 어느새 산책을 시작한 지 2시간 여 지났을 무렵. 안양천에 서면 그간 밟아온 도시의 구석구석이 각양각색 이미지로 형성돼 뇌리를 스칠 것이다.
'산 넘고 물 건너' 다다른 안양천은 길이 34.8km로, 한강지류 가운데 중랑천 다음으로 길다. 경기 의왕시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군포시, 안양시, 광명시를 지난 뒤 서울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양천구, 강서구를 거쳐 한강에 흘러든다. 안양천변길을 따라 걷다 수도권지하철 1호선 구일역에 다다르면 구로명품올레길 도심형 1코스가 끝난다. 자연을 좀 더 만끽하고 싶은 사람은 여기서 길 반대편으로 가서 목감천을 거슬러 내려가는 하천형 코스를 따라 걸으면 좋다.
반면 도심형 코스로 계속 산책하고 싶다면 고척교를 건너 안양천 반대편에 위치한 계남근린공원으로 향하면 된다. 코스가 직선이라 다소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안양천 풍경은 제법 운치 있다. 이 길의 또 다른 장점은 걷다 지치면 언제든 대중교통을 이용해 귀가할 수 있다는 점. 전 구간이 평탄해 초급자도 어려움 없이 트레킹이 가능한 것도 장점이다.
도심과 자연이 어우러진 안양천과 신구로유수지생태공원의 겨울 풍경.
안양천에서는 서울 둘레길 6코스도 만날 수 있다. 서울 둘레길 6코스는 다시 2개로 나뉘는데 수도권지하철 1호선 석수역에서 구일역까지 8km(소요시간 2시간 5분) 구간이 6-1코스. 여기서 가양대교 남단(가양역)까지 이어지는 10.2㎞(소요시간 2시간 25분)는 6-2코스다. 만약 고려대구로병원에서 걷기를 시작한다면 구일역까지 2시간, 가양역까지는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서울 구로구, 영등포구, 양천구, 강서구 등 코스를 관할하는 지방자치단체마다 아기자기한 테마 산책로, 체육공원, 맨발 황톳길, 인라인스케이트장 등을 조성해 다채로운 멋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무리는 금물. 필자는 제법 쌀쌀한 날 명품구로올레길 도심형 1코스와 서울둘레길 6-2코스를 욕심내 걷다가 근육통을 얻었다. 그래도 서울 도심과 강 풍경을 눈에 담고 두 발로 걸으며 삶을 성찰했던 시간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망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네 다리로 걷다가 이내 뛰어다닌다. 포유류 중에서 걸음마를 하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동물은 인간이라고 한다. 비틀비틀 한발 한발 내딛던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워지면서 우리는 이내 걷기의 감동과 희열을 잊고 만다.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시간 속에 당연한 듯 걸음을 소비하고 만다.
하지만 걷기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열쇠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사람이 직립 보행으로 손을 자유롭게 쓰게 되면서 진화했을 개연성이 크다. 올겨울 주변과 공감하며 자연스레 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걷기를 즐겨 보자.
- EDITOR: 황승경
- PHOTO: 황승경, 구로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