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음미하며 미래를 사색하다 인천 역사문화의 거리, 차이나타운
지난해 인천 중구에서 열린 '인천개항장 문화유산 야행' 현장 모습. 축제가 열리는 '인천개항장 문화지구'에는 수많은 근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 수많은 역사적 공간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났다.
그럼에도 고스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글로벌 도시였던 인천역 부근에 가면 우리네 150년 근현대사가 엿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곳. 어린 아이들은 이국적인 풍경이 마냥 신기하고, 어른들은 새로운 분위기에 취할 수 있어 좋다.
인천 중구 구도심 인천역 부근은 대한민국 근현대 도시 발달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 공간이다. 구석구석 걷다 보면 구한말 개항시기부터 신문물 도입, 외세의 침탈과 착취, 6·25 전쟁과 산업화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 민초들이 흘렸을 눈물, 땀, 핏자국도 곳곳에 남아있다.
인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길을 걸으며 만나는 건축물은 많은 사색거리를 안겨준다. 1899년 건설된 인천역은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철도의 종착역으로 탄생했고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슬픈 근대사 서린 인천 제물포항
잠시만 역사를 돌아보자.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서구 열강은 자원과 노동력 확보를 위한 해외 식민기지 건설에 전력했다. 19세기부터는 동아시아로 눈길을 돌려 이 지역 나라들에 문호 개방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그 선택은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강화해협 침략으로 이어졌다.
영국에서 수입한 군함 운양호를 앞세워 조선을 압도한 일본은 속수무책 무너진 조선에 배상과 함께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 조정은 수도 한성과 가까운 인천의 개항만은 피해보려 했지만 인천이 한반도 침략에 유리하다고 계산한 일본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1882년 8월 제물포항이 열리면서 인천은 조선팔도에서 가장 먼저 외국 문물을 받아들였고 세계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도시로 거듭났다. 열강들의 조선 강탈 각축장이던 인천 제물포엔 핍박과 설움의 눈물이 서린 우리 근대사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열강은 자국민이 맘 놓고 다닐 수 있도록 지방 행정권을 위임받는 외국인전용 거주 지역 조계를 만들었다. 지금 인천 화교 소학교가 있는 자리는 당시 '이사부'라 불린 청나라 영사관이 있던 곳이다.
당시부터 형성된 차이나타운은 이제 수많은 사람이 찾는 인천의 명소가 됐다. 여기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즐비한 중국 음식점. 상당수가 특색있는 자장면을 판매한다. "중국엔 자장면이 없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자장면은 이미 한국화한 음식이다. 하루 평균 전국에서 800만 그릇이 소비된다는 자장면은 1880년대 인천에서 일하던 중국 노동자들이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자 중국 산동 지방 음식을 변형해 만들어 먹은 데서 유래했다. 볶은 춘장에 면을 삶아 비벼 먹는 이 요리는 간단하지만 든든해 고된 노동자들에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05년 인천 차이나타운에 문을 연 '공화춘' 건물은 현재 자장면박물관으로 재탄생해 자장면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우리나라에 외식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1950~60년대부터 자장면은 본격적으로 한국인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차이나타운에서는 자장면 외에도 화덕에 구운 만두, 양꼬치, 부추 군만두, 공갈빵 등등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해 관광객의 오감을 자극한다.
인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엔 일본조계(1883)와 중국조계(1884) 사이 경계를 짓는 계단이 있다. 120년 역사를 간직한 이 계단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문화적 공간이 형성됐고 아직도 중국문화권과 일본문화권이 명확히 구분된다. 계단 위쪽으로 중국 청도에서 기증한 거대한 공자 석상이 세워져 있어 인공적인 느낌을 풍긴다.
인천항을 바라보는 맥아더장군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빼 놓을 순 없다.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낙동강에 도달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 허리를 절단해 섬멸할 계획으로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비밀리에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 덕분에 수도 서울 탈환의 교두보가 마련됐고,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으로의 연결선이 끊어져 전력이 약화됐다.
남한이 전쟁 초기 열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는 데도 인천상륙작전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인천에 이 사건을 기념하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있기는 하지만, 독야청청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이 훨씬 인상적인 상징물이다. 이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덕분에 동상 부근은 늘 인산인해를 이룬다.
자유공원의 첫 이름은 만국공원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제물포항 주변에 거주하는 여러 국가 출신 외국인을 위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건설 5년 만인 1888년의 일이다. 응봉산 정상부분에 조성된 이 공원은 인천 시가지와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공원 이름이 처음 달라진 건 일제강점기. 일본 신사가 들어선 '동공원'의 반대 방향이란 의미의 '서공원'으로 불렸다. 이후 1957년,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세워지면서 공원 이름도 대한민국 자유 수호의 강건한 의지를 담은 자유공원으로 변경됐다. 일제 잔재인 '서공원'보다 훨씬 의미 있지 않은가.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자유공원은 수풀이 우거지고 계절마다 꽃이 만발해 꼭 한번 찾아볼 만한 장소다.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뒤 일본공병대는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조선의 정기를 끊어버리려 했다.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석문(石門) 홍예문을 만들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인천 지형은 날아가는 용의 형상으로 홍예문 일대가 그 허리쯤이라 한다. 여전히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이 문 위에 오르면 인천 앞바다와 항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자유공원에서 제물포역 방향으로 내려오면 신포국제시장과 만난다. 개항과 함께 시작돼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인천의 대표 시장으로, 다양한 먹거리와 전통시장의 흥을 누릴 수 있다. 이어서 답동성당(사적 제287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인천 최초의 천주교 성당으로 오랜 역사를 간직한 답동성당은 돔형 천장과 기둥, 스테인드글라스 덕에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본당은 1889년 설립됐지만 현재의 모습을 갖춘 건 1937년 재건축 때라고 한다. 작년 6월에는 성당 마당에 잔디공원을, 옛 가톨릭회관 터에는 계단공원을 조성하고 지하주차장을 만드는 등 새 단장을 마쳤다.
인천 역사문화의 거리와 차이나타운 일대는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이 드나들던 흔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최고의 시티워크 코스다. 이곳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고 나아가야 할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EDITOR: 황승경
- PHOTO: 황승경, 인천광역시 중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