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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ING TRAVEL

겨울 왕국 모스크바, '마법'처럼 펼쳐진 하얀 동화 속 세상

황제에 의해 탄생한 성 바실리 성당.

작은 공국에서 시작해 소수민족을 통합하며 몸집을 키운 러시아는 지구촌 면적의 7분의 1을 꿰차고 있다.
같은 러시아임에도 시차가 무려 11시간이나 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꼬박 일주일을 달려야 도착하는 모스크바.
그곳은 거대한 나라를 이끄는 심장이자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말한 것처럼 러시아인들에게 어머니 같은 곳이다.

모스크바 여행객들에게 필수 코스로 꼽히는 붉은 광장.

"파리는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다워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파리지엔이 한 말이다. 어떤 이는 "뉴욕은 가을이 최고"라 했다. 영화 '닥터 지바고' 때문일까? 내게 러시아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마음 내킬 때마다 훌쩍 떠날 수 있는 곳은 아니기에 기왕이면 눈 내리는 러시아를 보고 싶어 겨울 한복판에 그 안으로 들어갔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툼한 털모자에 모피 코트를 입은 여인들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러시아 풍경 그대로였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첫 발을 들인 곳은 모스크바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라는 '붉은 광장'. 이곳에서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것은 1560년에 태어난 성 바실리 성당이다. 알록달록 양파 모양의 돔으로 유명한 이 성당은 곧 파리의 에펠탑이요,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다.

크렘린 매표소 가는 길목의 겨울 풍경.
노보데비치 수도원 앞 호수공원에서 신나게 눈썰매를 타는 모스크바 여인들.

밤마다 변신하는 '마법의 성'

길쭉한 광장 끄트머리에 들어앉은 성당은 앙증맞은 장난감 같았다. '한 발짝씩 더 와라~ 그래야 진정한 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듯 세이렌의 유혹처럼 여행자를 홀리는 요염한 성당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기에 한 바퀴 돌며 요리도 보고 조리도 봐야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까도 까도 또 나오는 러시아 전통 인형(마트료시카)처럼 볼수록 신기한 성당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황제(이반 4세)에 의해 세워졌다. 250년 가까이 러시아를 지배해온 타타르족(몽골)을 몰아낸 할아버지(이반 3세)의 승리를 기념해 만든 것이다. 그 성당에 반한 이반 4세는 다시는 이런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축 담당자 두 명을 장님으로 만들었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전설일 뿐이다.

붉은 광장에 자리한 굼백화점 옆 골목은 밤마다 화려한 조명으로 여행객을 유혹한다.
굼백화점 앞 붉은 광장엔 겨울이면 다양한 기념품점이 들어서고 스케이트장이 운영된다.

바실리 성당 오른편에 자리한 크렘린이 곧 러시아의 심장이다. 크렘린은 요새를 의미한다. 타타르족을 몰아내고 쌓은 성벽은 누구든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높고 두툼하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성벽 안에는 지금도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해 황제 대관식을 치르던 성당과 황실 무덤을 품은 성당 등 러시아의 역사가 꽁꽁 숨어 있다. 반면 붉은 광장 외벽 묘지엔 숨을 거둘 당시 모습 그대로 방부 처리된 레닌이 살포시 누워 있다. 이목구비를 찬찬히 보려면 뒷사람 눈치가 보일 만큼 줄이 밀리는 건 무료 관람인 때문이다.

크렘린 맞은편에 펼쳐진 건물은 1890년대에 지어진 굼백화점이다. 러시아 최고령 백화점은 덩치가 엄청나다. 그 몸체를 전구로 꼼꼼히 감싸 어둠이 내리면 반짝반짝 빛나는 마법의 성으로 변신한다. 이에 질세라 성 바실리 성당도 불을 밝히고 광장을 둘러싼 나무들과 하늘을 덮은 조명등까지 곱게 피어나면 그야말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그런 밤을 놓치면 붉은 광장은 반쪽만 본 셈이다.

땅속 100m 지하철역? 화려한 궁전!

지하 깊숙이 파고든 모스크바 지하철역은 대부분 그 자체로 미술관이요 박물관이다.
아르바트 거리 안에 있는 빅토르 최 추모벽.

모스크바에서 인상 깊었던 곳은 지하철역이다. 1935년에 개통된 모스크바 지하철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을 대비한 방공호였고 냉전시대엔 핵전쟁 피란처였다. 그만큼 땅속 깊숙이 파고든 지하철을 타려면 보통 100m가 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길기도 하거니와 속도도 의외로 빨라 은근 긴장하게 된다. 반사적으로 손잡이 벨트를 꽉 움켜쥐고 내려온 승강장은 곳곳이 화려한 지하 궁전이요, 웅장한 박물관이자 미술관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스탈린의 의도가 담긴 것이지만 수많은 관광객이 '지하 예술'을 보기 위해 깊은 땅속으로 몰려든다. 나 역시 오로지 지하철역을 구경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곤 했다. 호화로운 샹들리에로 가득한 콤소몰스카야역에선 귀족이 된 듯했고, 도스토옙스카역에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그림으로 읽었다. 청동 조각으로 가득한 플로샤디 레볼류치역에선 군인 옆에 앉은 개의 주둥이도 슬쩍 만졌다. 그걸 만지면 행운이 온다 하여 날마다 깊은 땅속을 오르내리며 출퇴근하기 바쁜 시민들이 너도 나도 손을 대니 청동 주둥이가 반질반질하다.

그런 땅속을 헤집고 다니다 올라와 향한 곳은 구 아르바트 거리다. 크렘린에서 도보로 넉넉잡아 15분이면 닿는 이 거리는 차량 통행이 금지된 보행자 천국이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젊음의 거리다. 1km에 달하는 거리 중간쯤엔 그림과 글로 빼곡한 한국계 러시아 가수 '빅토르 최 추모벽'도 서 있다. 1980년대 중반 억압된 구소련 사회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음악으로 저항한 록그룹 '키노' 리더였던 빅토르 최는 음악으로 위로받던 젊은이들의 우상이다. 1990년 8월 15일 의문의 교통사고로 28세에 요절한 그는 '러시아의 제임스 딘'이 되어 지금까지도 팬들이 오며 가며 애도한다.

"잘 있어, 친구들" 푸시킨의 흔적들

사회주의 둑이 무너지고 스타벅스, 맥도날드 등 자본주의 물결이 꾸물꾸물 들어온 거리 말미엔 박물관으로 변신한 푸시킨의 신혼집이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러시아 국민작가 푸시킨은 청소년기부터 격투기로 단련된 싸움의 고수였다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결투를 하다 38세에 죽었다. 1831년에 결혼한 미모의 어린 아내 때문이다. 예쁜 아내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며 염문설을 퍼뜨린 남자에게 모욕감을 느낀 푸시킨은 결국 결투 끝에 총상을 입고 이틀 만인 1837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눈 감기 전 마지막에 "잘 있어, 친구들"이라고 했다는데, 그 친구들은 곧 서재에 있는 책들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했던 그가 노여움 때문에 죽었으니 참으로 묘하다.

푸시킨박물관 인근에 우뚝 선 외무부 건물은 '스탈린의 7자매' 중 하나다. 뉴욕에 버금가는 초고층 빌딩 7개(모스크바대학교, 아파트, 호텔 등)를 통칭한 것으로 이 또한 자본주의에 맞서 스탈린의 명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이다. 하지만 비슷한 외모의 꺽다리 건물들은 왠지 모스크바에 어설픈 뉴욕이 끼어든 것처럼 생뚱맞은 느낌이다.

아르바트 거리 끝자락에 자리한 푸시킨 신혼집 내부. 지금은 푸시킨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푸르스름한 푸시킨 신혼집 뒤로 보이는 게 '스탈린의 7자매' 중 하나인 러시아 외무부 건물로 주변 건물들과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기념품점의 필수 품목은 두툼한 모자와 러시아 전통인형이다.

모스크바에서 놓치면 아쉬운 곳이 노보데비치 수도원이다. 고풍미가 좔좔 흐르는 1524년생 수도원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모스크바의 숨은 보물이다. 요새처럼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원 안엔 러시아 문학을 빛낸 니콜라이 고골, 안톤 체호프를 비롯해 인류 최초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옐친 등 러시아 유명 인사들이 잠든 묘지를 품고 있어 인생의 덧없음을 말없이 보여준다.

이 수도원이 더 유명해진 건 수도원을 둘러싼 호수공원 풍광에 영감을 얻어 '백조의 호수'를 작곡했다는 차이콥스키의 일화가 알려지면서다.

커피 한 잔, 보드카 한 모금에 스르륵~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눈꽃 같은 가로등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눈 내리는 모스크바 밤거리.

차이콥스키의 눈에 담긴 호수는 찰랑대는 물결이었겠지만 내 눈에 들어온 호수공원은 온통 눈밭이었다. 스키를 타고 산책을 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도톰한 언덕엔 눈썰매를 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눈밭에서 이렇게 '추위 맷집'을 키운다. 그들은 구경만 하는 나를 웃음과 손짓으로 끌어들였다. 덕분에 그들 틈에 섞여 정말이지 신나게 눈밭을 뒹굴었다.

사실 보름간의 여행 내내 눈이 내렸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눈을 보긴 처음이다. 우리 같으면 교통대란으로 난리이련만 눈 치우는 데 도사인 이곳에선 다들 태연하다. 탱크 행렬처럼 줄을 이은 제설차가 눈을 밀어내면 체인도 감지 않은 차들은 잘도 달린다. 인도를 향해 점점 쌓여가는 눈길을 걷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짜릿한 보드카 한 모금에 스르륵 몸이 풀리는 그 기분… 겨울 러시아의 맛이다.

역시 러시아는 눈이다. 아마도 눈 없는 러시아는 밍밍했을 것이다. 마지막 밤엔 왠지 아쉬운 마음에 숙소 앞 작은 공원에 나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러시아 사람들처럼 벌렁벌렁 눕기까지 했다. 하지만 떠나는 날 아침에 나와 보니 내 몸 자국들은 밤새 내린 눈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려니 했음에도 왠지 섭섭했다. 해마다 겨울이면 모스크바에 흩날리는 그 눈발이 그리워질 것이다.

Travel Information

인천에서 모스크바까지 매일 직항 노선(대한항공·아에로플로트)이 있다. 비행시간은 9시간 20분. 대한민국 여권으로 비자 없이 60일간 체류가 가능하다. 공항에서 시내로 갈 땐 벨라루스역까지 논스톱으로 운행되는 아에로익스프레스(30분 간격 운행, 35분 소요)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다. 참고로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 아닌 1월 7일이다. 러시아정교가 그레고리력이 아닌 율리우스력을 쓰기 때문이다.

  • WRITER: 최미선
  • PHOTO: 신석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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