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선 숲길 걷는다 보인다 느낀다 꿈꾼다
노을이 내린 경춘선 숲길. 옛 무궁화호 열차를 개조해 만든 방문자센터가 서정을 완성한다.
19세기 말 어느 화창한 날, 고종이 산책하다 영국공관 내 테니스 코스에서 이리저리 뛰며 테니스를 치는 선교사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렇게 힘든 일을 머슴 시키지 왜 직접 하느냐."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안다. 운동은 결코 노동이 아니라는 걸.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몸을 움직이면 근육이 강화될 뿐 아니라 사색과 성찰의 기쁨도 얻을 수 있다. 올봄, 경춘선 숲길을 따라 걸으며 건강한 마법에 빠져보면 어떨까.
기차의 발명은 인간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자원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경제 규모가 커졌다. 사방으로 건설된 철로 덕분에 제1차 산업혁명의 파급력은 배가될 수 있었다.
철도의 중요성을 간파한 일제는 침략의 검은 속내를 구체화하고자 가장 먼저 조선 철도 부설권을 손에 넣었다. 대한제국 경제와 교통 발전이라는 허울로 철도를 건설하고, 식민지 수탈과 대륙 침략 수단으로 삼았다. 멀쩡히 주인 있는 땅에 철로를 놓고 역사를 세워야 하니 조선인 집과 땅은 몰수됐다. 공사 노동에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되기도 했다.
한동안 아픈 역사의 상징이던 철도는 이후 우리나라 산업화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발판이 되며 만남과 헤어짐, 성장과 도약의 상징이 됐다. 이렇듯 시대와 세대를 거치며 기차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서울과 춘천을 잇는 경춘선(성동역-춘천역)은 1939년 개통됐다. 조선총독부가 당시 철도역이 있는 철원으로 강원도청을 이전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춘천지역 유지들이 사재를 털어 철도회사를 설립했다. 이때 힘을 모은 춘천 유지 12인 가운대 조선인도 있어서, 경춘선은 조선 자본이 들어간 최초의 철도로 기록된다.
이후 경춘선은 젊음과 낭만의 노선이 됐다. 1979년 시작돼 2001년까지 이어지며 한국 대중문화를 선도한 강변가요제의 무대 가평역에 가려면 경춘선을 타야했기에, 경춘선은 꿈 많은 청춘이 젊음을 만끽하는 장소로 여겨졌다. 경춘선에 있는 대성리·청평·가평·강촌역의 관광 휴양지는 한동안 대학생으로 붐비는 단골 MT 장소였다.
시간이 흐르며 무궁화호 단선으로 운행되던 경춘선이 폐지되고 지금은 새로 완공된 복선 전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1시간 50분 걸리던 청량리역에서 남춘천역까지 가는 여정이 이제는 일반 79분, 급행 63분으로 단축됐다. 하루 36회만 운행해 늘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이 붐비던 경춘선은 137회로 횟수가 늘어 한적해졌다.
이제 더 이상 MT 온 학생들이 돌아가는 기차를 놓칠까봐 발을 동동 구르며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더 빨라지고, 더 쾌적해지고, 더 편리해졌고 무궁화호 단선 경춘선 철로는 한때 고철로 폐기처리 될 신세가 됐다. 다행히 67년의 노고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면서, 성북역~퇴계원역 구간 선로가 원형 그대로 유지돼 2018년 '경춘선 숲길'로 재탄생했다.
아련한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꿈길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경춘선은 단순한 기찻길이 아니었다. 아련한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공간이었다. 옛 경춘선을 따라 조성된 숲길이 공원으로 탈바꿈돼 지금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운치를 안겨준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경춘선 화랑대역 외관(왼쪽)과 옛 모습을 간직한 내부 모습.
경춘선 숲길은 서울 노원구 월계동 광운대역 일대에서부터 화랑대역을 지나 담터마을 인근까지 5.4km 길이로 이어진다. 서울 북서지역의 대표적인 산책길로 정평이 나있다. 경춘선 숲길은 크게 3구간으로 나뉘는데 1구간은 경춘철교(녹천중학교~공릉동 과기대입구) 부근, 2구간은 공리단길(행복주택공릉지구~육사삼거리) 부근, 3구간은 화랑대 철도공원(옛 화랑대역~삼육대 앞) 부근이다.
1구간에 가려면 서울지하철 1호선 월계역 4번 출구 또는 7호선 하계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이곳에선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무궁화호 열차가 방문자센터로 변신해 사람들을 맞는다. 중랑천을 가로지르며 서울과 춘천을 오갔을 '경춘철교'는 경춘선 숲길의 보행자 전용 다리가 돼 시민의 든든한 친구가 되고 있다. 기억과 추억으로 가득한 철길을 따라 걷노라면 나의 과거가 떠오르고 미래의 꿈도 피어오른다.
2구간은 공릉동 도깨비시장을 비롯해 사이사이 숨어 있는 많은 카페와 아기자기한 상점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푸른 하늘과 숲길 사이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자연을 체험하고, 왁자지껄한 전통시장의 활기와 상점 상인들의 정다움으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는 도깨비시장은 노원구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으로 저렴하면서 질 좋은 물건이 많다. 인심 좋기로도 유명하다.
또 이 구간에는 경춘선 숲길의 인증샷 명소인 오픈 갤러리와 숲속마당이 있다. 오픈 갤러리에서는 입체벽화, 시,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숲속마당은 소나무 숲속에 아담하게 꾸민 야외 공연장으로, 주말에는 시낭송대회를 비롯한 콘서트와 공연이 열린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주옥같은 멜로디와 매혹적인 시 구절에 도취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경춘선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입체벽화, 시,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오픈 갤러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레트로 감성 그대로
길을 걷다 저 멀리 육군사관학교 정문이 보이면 3구간에 다다른 것이다. 가로수 길을 지나면 화랑대 철도공원이 나온다. 과거 춘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여정의 마지막 간이역이었던 화랑대역을 개조해 철도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철도공원에는 수원-인천, 수원-여주 구간에서 운행한 협궤열차가 전시돼 있다. 이곳에 오기 전 1975년부터 2017년까지 어린이대공원 입구에 전시됐던 열차라 많은 이에게는 또 다른 어린 시절 추억을 선사한다.
옛 화랑대역 철로 플랫폼에선 이외에도 각양각색 여러 기차를 만날 수 있다. 고종이 이용했던 황실전차, 체코에서 온 노면전차, 일본에서 기증받은 '히로시마 900' 등이 다시 힘차게 철로 를 달릴 기세로 놓여 있다. 무궁화호에 마련된 전시 공간 '타임 뮤지엄'은 기차를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관람객들은 '타임 뮤지엄' 1호차부터 탑승해 걸어가며 내가 걸어 온 길, 내가 보낸 시간을 회상한다.
지난해 독일 원더랜드와 같은 미니어처 전시관 '노원 기차마을'도 문을 열었다. 약 2년에 걸쳐 1/1000 크기로 정교하게 제작한 미니어처 기차가 다양한 볼거리를 안겨준다. 경춘선 화랑대역은 이미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정든 역사에 들어가면 예전 모습을 그대로 전시해 볼거리가 풍성하다. 빛바랜 오랜 사진처럼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펼쳐진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 서울 최초의 야간조명공원인 노원불빛정원이 형형색색 알록달록하게 색의 신비를 발산한다.
1947년 작곡된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동요를 들어 보면, 기찻길 옆에 살아도 아기도 잘 자고 옥수수도 잘 큰다. 이 동요 가사처럼 우리 추억 속 기차는 '칙칙 폭폭' 잘도 간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는 현대식 KTX와는 다른 레트로 감각이 경춘선 숲길에 있다. 녹슨 철로 위를 걷다보면 가슴 한 편에 숨어 있던 추억도 되살아난다.
- ARTICLE & PHOTO: 황승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