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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밝힌 여인, 조선인 여의사 양성 씨앗 뿌리다 로제타 셔우드 홀

로제타 셔우드 홀(1)

고려대 의과대학의 초석을 놓은 미국인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all·1865~1951)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우리 땅에서 의료 소외 계층을 위해 헌신한 의사다. 그가 1928년 9월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학교육기관인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오늘날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성장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평생을 바친 홀 여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1865년 9월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현 드렉셀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의대생 시절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홀 여사는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등 여러 경험을 쌓은 뒤 1890년 조선에 왔다. 그에게 맡겨진 첫 임무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 '보구녀관' 원장이었다.

자주적 여성 의학교육기관 설립

당시 조선에는 의료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가 많았다. 특히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기를 꺼리던 여성들에게 홀 여사는 큰 환영을 받았다. 그의 일기를 보면 보구녀관에 근무하던 3년 사이에 병원을 방문한 환자 수가 1만 4,000명이 넘는다.

홀 여사는 이들을 돕고자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번은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을 만큼 큰 화상을 입은 소녀가 병원에 왔다. 최선의 치료법은 피부 이식 수술이라고 판단한 홀 여사는 소녀 팔에서 피부를 떼어내 환부에 이식했다. 그런데 서양 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환자가 두 번째 치료부터 팔 피부를 떼어내기를 거부했다. 홀 여사는 자기 팔에서 피부를 세 조각 떼어내 환자에게 이식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선교사, 환자의 오빠 등도 각자 자기 피부를 떼어줬다.

그렇게 여러 명의 도움을 받아 소녀는 약 30조각의 피부를 이식했고 마침내 고통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홀 여사는 이 땅의 여성들을 힘써 치료하면서, 동시에 조선 여성을 의사로 길러내기 위한 노력도 했다. 지속 가능한 여성 진료 체계를 만들려면, 조선인 여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과 딸 에디스를 잃고 큰 아픔과 시련 속에 있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의사 양성을 지원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의사가 된 사람 중엔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가 있다.

아래 왼쪽에서 세 번째가 로제타 셔우드 홀 사진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 개강 당시 기념 사진. 아래 왼쪽에서 세 번째가 로제타 셔우드 홀이다

박에스더는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900년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까지 서양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된 조선 사람은 서재필 한 명뿐이었다. 박에스더 이후에도 의학 공부를 위해 외국으로 떠난 여학생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혼과 중도 귀국 등으로 학업을 포기한 사례가 많아 의사가 추가로 배출되지는 못했다. 홀 여사는 조선에서 직접 여성 의사를 키워야겠다고 결심하고 1913년 당시 평양에 있던 여성 병원 '광혜여원'에 여성의학반을 개설했다.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운영이 어려워졌고, 홀 여사는 다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 조선 여성을 청강생으로 입학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때 청강생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한 김영흥, 김해지, 안수경 등은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제2회 졸업생들과 함께 졸업하면서 국내에서 정식 의학교육을 받아 의사면허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다.

192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더 이상 청강생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또 한 번 시련이 찾아왔다. 하지만 홀 여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여성 의학 교육기관을 설립하겠다고 결심했고, 마침내 1928년 9월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5년 간 헌신하던 홀 여사는 의학강습소를 의학전문학교로 전환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건강이 악화돼 193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미 68세로, 은퇴 연령이 한참 지난 때였다.

길정희 여사, 홀 여사, 김탁원 선생 사진
홀 여사와 함께 일생을 여성의학교육기관 설립과 운영에 힘쓴 길정희 여사, 홀 여사, 김탁원 선생(왼쪽부터).

1933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김탁원, 길정희 부부가 승계하여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되었다. 이곳에서 박순정 등 13명의 의사시험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 기관은 김종익 등이 기부한 민족자본을 바탕으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발돋움했고, 광복 후 서울여자의과대학, 수도의과대학, 우석대 의과대학 등을 거쳐 지금의 고려대 의과대학이 됐다.

홀 여사의 박애 정신은 지금까지 고려대의료원 곳곳에 남아있다. 의과대학은 2016년 여름, 지구촌 곳곳에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로제타 홀 봉사단'을 창단했다. 의대생들은 지도교수와 함께 세계 각지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펼치며 환자를 헤아리는 마음가짐을 배운다. 안산병원은 2016년 '로제타 홀 센터'를 개소했고 안암병원 역시 2022년 '로제타 홀 봉사단'을 발족하여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저소득층, 다문화가정, 외국인 노동자, 농촌 산간 지역 등에서 지역사회건강 증진사업과 해외 봉사활동을 진행 중이다.

또한 본격적인 민족과 박애의 실천을 위해 의료원은 2021년 사회공헌사업본부를 출범하여 2022년에는 국내 의료 기관 최초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고통 받는 난민을 돕기 위해 의료진을 파견했고 최근에는 국내 의료기관 중 처음으로 'ESG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며 의료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성 의사 양성의 전기 마련

홀 여사가 우리나라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이 외에도 더 많다. 그는 특수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미국에서 배운 '뉴욕 점자'를 바탕으로 '평양 점자'를 만들어 시각 장애인을 가르쳤다.

평양 점자는 1926년 '훈맹정음' 창제 전까지 국내 시각장애인이 널리 사용하는 문자였다. 홀 여사는 또 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의 길도 열었다. 중국 농아교육법을 배워 1909년 '평양농아학교'를 설립했다. 홀 여사는 조선에 44년 간 머물며 여성전용병원 2개, 여자의학강습소 1개, 소아과병원 2개, 간호학교 2개, 결핵병원 1개를 세우고, 맹아학교와 농아학교 각 1개, 고등학교 1개, 초등학교 1개를 건립했다.

홀 여사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1893~1991)도 어머니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홀 여사가 보구녀관에서 일하던 시절 태어난 셔우드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의과대학 졸업 뒤 1926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와 결핵 퇴치에 온힘을 기울였다. 1928년 국내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했고, 1932년 남대문이 그려진 국내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도 발행했다.

홀 여사와 아들은 현재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임종 시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홀 여사와 함께 조선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 감염병으로 사망한 남편 윌리엄, 딸 에디스 또한 같은 곳에 묻혔다.

격동기 조선의 신산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사랑과 나눔의 인술을 통해 많은 이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 거인. 그의 선구적 정신과 헌신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이의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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